이 책 명작 순례는 <국보 순례>와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강의 3> 출간 이후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출판된 것이라고 한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3>의 미술사적 서술은 역사적 체제에 따르는 제약으로 인해 한 작품의 탄생 과정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줄 공백이 없었고, <국보순례> 역시 '문화유산을 보는 눈'을 말한 일반론에 해당하기 때문에, 각론에 해당하는 그림과 글씨에 대한 개별 감상법을 언급할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 경우 두 책 모두 안읽어봤기에 무언가 빠진 내용이 있는 듯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는 유홍준이 개인적 미술사적 견해에 의해 엄선한 우리 회화 중, <국보순례>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는 26점을 제외하고 기본정보와 해설을 필요로 하는 옛그림과 글씨 49점을 기본으로 이에 동반되는 작품 100여 점의 도판을 겻들인 그림과 그림에 얽힌 역사적 일화에 대한 책이다.
![]() | 명작순례 - ![]() 유홍준 지음/눌와 |
선택된 그림과 화가는 조선 전기, 후기,말기 별로 나누어 세 개의 챕터를 구성하고, 불교미술 및 서예작품들에 대해서도 각각 별도의 챕터를 이룬다. 조선 전기에는 신사임당, 허주 이징, 김정, 이정, 이경윤, 김명국, 윤두서, 남태응 등이, 중기에는 겸재 정선, 관야재 조영석, 능호관 이인상, 현재 심사정, 신광하,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고송 이인문, 초전 오순, 수월헌 임화지가, 그리고 조선 말기에는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북산 김수철, 일호 남계우, 몽인 정학교, 오원 장승업, 석파 이하응, 심전 안중식, 김관호, 수화 김환기 등의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 대한 간략한 배경과 약력, 그리고 소개된 그림에 관련된 일화, 역사적 지식들이 총 32개의 선택된 그림에 대한 서술로서 걸쳐져 있다. 이어서 사경과 글씨 편에서는 고려사경의 법화경 보탑도, 숭례문 현판, 봉래 양사언, 홍랑, 한석봉, 이광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그리고 마지막 파트에는 우리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왕실미술에 대한 소개와 설명이 있다.
석농과 같은 당시의 미술 비평가들의 세세한 작품 분석과 당시 미술계의 분위기, 그리고 안평대군과 같은 회화수집가들의 세계를 보여준 것은 매우 참신했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위대한 화가는 그림을 사랑하는 수집상과, 시대를 오가며 그림을 해석할 줄 아는 눈을 가진 안목 높은 비평가가 공존할 때에야 탄생할 수 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평이란 것이 그리고 미학이라는 것이 서구의 철학에서 출발해서 서구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우리 옛 그림이 서구의 것과 다른 철학과 다른 방법으로 그려졌던 만큼 그림을 보고 느끼고 해석하는 고유의 눈과 우리 고유의 비평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풍부한 문화적 교감을 가진 선조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상상이 되며 뿌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 미술사적이거나 전문적이거나 미학적인 설명이 주가 된 것은 아니다.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대중을 위한 책이다.
유홍준은 본인이 미술사가로서의 지식을 대중과 나누어 갖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 생각하고 있으며, 순례기와 답사기를 써오는 것은 스스로 세상에 진 빚을 갚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았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사상 유례가 없는 시리즈 발간과 기록적인 판매는 분명 그가 세상에 졌다는 빚을 충분히 갚을 만큼 대중에게 우리 문화 유산을 알리고 친숙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는 분명, 재미있으면서도, 흥미롭게 우리 산천 구석구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명작순례는 조금 다르다. 그가 세상에 졌다는 빚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책을 통해 약간의 인세를 받을지언정, 어떤 종류의 빚도 생각만큼 잘 갚아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가 우리 땅 구석 구석에 숨은 많은 이야기들과 친숙한 입담으로 여행자들에게 풍부한 볼거리와 공감대를 제공하여 대중들의 관심과 애착을 이끌어냈던 만큼, 그 강도로 이 책 명작 순례가 숨겨진 우리 서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확 불을 붙일 힘이 보이지는 않는다.
오주석, 손철주 등이 친숙한 내용의 책을 통해 먼저 구축해 놓은 조선 회화의 대중의 눈높이에 비교해 볼 때, 그들의 책이 대중을 한국 회화로 접근하게 했던 알찬 역할에 비한다면 유홍준이 서문에서 언급한 '개별작품의 감상적 측면'에서는 딱히 절절하게 와닿는 느낌이 부족하다. 풍부한 감동을 동반한 감상적 공유 대신 내용의 주를 이루는 것은 그림을 그린 사람의 가계도와 정치적 위상, 길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관직에 대한 약력들, 저자가 이룬 학문적, 미술사적 업적, 어려운 한자어로 된 제목으로 된 화가의 저서의 목록 등이 적은 양의 설명과 함께 나열된 점이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저 모으는 것은 아니라네
- 조선시대 문장가 유한준 -
저자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담은 유명한 말,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유한준의 문장에서 영감을 받은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이해한 것 만큼 보인다는 뜻일테고, 미술에 대한 이해에는 공감할 수 있는 감동이 수반되어야 독자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은 넘치는데 책을 통해 알고자 했던 것들이 앎을 충족시켜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 읽고 있는 다른 옛그림 관련 책들 중 가장 평이하고도 교과서적인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