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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양다리의 최후

[도서]쾌락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저/이현경 역
을유문화사 | 201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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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에 프랑스에서 쓰여진 스탕달의 <적과흑>에서 비상한 머리를 가졌지만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쥘리앙은 왕정복고라는 시대적 불운에 갇힌 자신의 운명을 사랑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듯 갈구한다. 1857년에 출간된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 엠마는 화려하고 우아한 귀족적 삶을 꿈꾸며 파멸을 향해 물질적 향락과 손에 잡히지 않는 쾌락을 추구했다. 왕정과 귀족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방향에 눈 먼채, 무한한 부가 샘솟듯 공급되는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적 삶을 그린 《쾌락》은 19세기 말, 그러니까 그러한 체제말의 귀족의 몰락이 새로운 시대의 뒷전으로 사라지기 직전이라는 감각 없이, 타고난 신분상의 부와 향락이 영원할 것처럼 그려진다. 나른한 귀족들의 일상은 탐미적이고 퇴폐적이지만, 이것이 바로 엠마가 꿈꾸었던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의 실체임을, 그리고 그런 꿈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이 실제했음을 알려준다. 


얼핏 쾌락이라고 하면 말초적인 감각적 즐거움을 쫓는 19금적인 혼잡한 섹스가 연상되지만, 그런 내용은 단 한 줄도 없다. 반대로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적 감정을 해부하듯 낱낱이 언어로 섬세하게 도려내어 테피스트리처럼 거대한 규모로 아름답고도 정교하게 그려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문학의 학문적 백그라운드가 없어서, 데카당스적이니 퇴폐주의니 유미주의라는 것의 정확한 뜻은 잘 모르지만, 이 소설은 과연 데카당스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해설에 보면 퇴폐적 자연주의라는 말도 나오는데, 가령 에밀졸라가 생각들을 집요하게 언어로 직조해냈던 것을 돌이켜본다면, 사물과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들을 있는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리속에 훤히 그려지도록 냄새와 촉감과 장면과 소리와 늒김까지도 정교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다는 면에서 오히려 에밀졸라의 소설보다도 더욱 자연주의라는 말에 수긍되는 책이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백작과 공작과 무슨 대사 그리고 그 부인들이다. 그들의 눈에 마부라든가, 하인이라든가 집사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하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고, 하인이 차려놓은 밥을 먹고, 하인이 사람들의 방문을 알리고, 마부가 모는 말을 타고 다니지만, 귀족들의 눈에 그들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의 구석에서 삶을 통채로 노동에 바쳐야만 귀족들의 향락적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라하고 황폐한 사람들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들의 눈에는 투명인간이다. 귀족들의  삶은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실존에 대한 고민은 없다. 


만일 <적과 흑>의 쥘리앵이 운좋게 단눈치오의 소설 속 사교장 한 구석에 있다가, 그의 주특기인 뭐 성서 암기라든가 통채로 암기 같은 쇼를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그 젊고 아름다운 얼굴과 능력이 그 귀족들에게 는 조금도 주목할 것이 못된다. 사교장에서 하는 말들은 자신들의 탐미적이고 고상한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만일 프랑스 시골에서 마담 보봐리가 잔뜩 멋을 부리고 치장을 하고 나타났더라도 이 사람들 눈에는 투명인간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몇천년동안 쌓아온 찬란한 예술적 문화적 유산을 가진 도시 로마는 최고의 배경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라보는 사물들(예술품들), 사용하는 물건들, 살아가고 또 방문하는 장소들은 모두 당장이라도 인터넷을 치면 화면 가득 사진들을 볼 수 있는 실제적 장소이고, 귀가 닳도록 들어 왔던 이탈리아 조각품과 회화작품들이다. 그들이 애정을 밀당하는 빌라 메디치와 스페인 광장, 그들이 돌아다니는 수많은 장소 모두 실제하는, 그리고 이탈리아의 예술혼이 깃들어져 있는 유서깊은 건축물들이다. 



새로운 애인을 손에 넣고 옛 애인을 되찾는 일을 똑같이 신속하게 진행시키고, 두개의 모험에서 어떤 상황이든 이용하려 하다보니 그는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히고  곤경에 빠지고 기이한 경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짓말과 방편과 비열한 수단과 꼴사나운 핑계와 야비한 속임수에 의지했다 374


이 문장은 전체 스토리를 한 줄로 요약해주고, 주인공 안드레이 스페렐리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도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련되고 우아한 여인 엘레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여자의 배신으로 헤어지고 나서 힘든 시간을 숱한 여성들과 사귀며 타락함으로서 보상받는다. 그런 타락은 파멸적인 허세로 치달아 결투로 이어지고 상대의 반칙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어 사촌 누이의 별장에서 요양하며 덧없던 카사노바의 삶을 반성하던 중 누이의 친구인 마리아의 방문은 그를 다시 본능적 인간으로 회귀시킨다. 완전히 반대의 성격을 가진 엘레나와 마리아 두 여성은 후에 로마 사교계에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의 바람둥이 안드레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하는지 헷갈려하는 것 같다.  물론 양쪽 다 온갖 상상할 수 없는 허언으로 구애를 한다. 엘레나가 팜므파탈적인 이미지라면 마리아는 순수하고 순결하고 종교적인 이미지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나타난 엘레나는 스페렐리보다 한 수 위다. 따라서 그녀의 말에 갈팡질팡하며, 그녀의 공식적 초대에 응해 호시탐탐 그녀의 남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달콤한 말로 구애를 하지만 쉽게 육체적인 합일을 이루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반면 마리아의 순수함과 죄의식은 안드레이에게 한없이 구애하게 만드는데, 그가 구사하는 시적인 언어는 퍼내도 퍼내도 끊임없이 샘솟는 옹달샘같다. 섬세하고 정교한 언어로 사랑의 감정을 마법처럼 구사하는 작가 단눈치오의 시적 영감은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바람둥이적인 기질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 <프랜즈>라는 시트콤의 열혈 팬이라면 로스가 결혼식장에서 자신의 신부의 이름을 레이첼이라 잘못 불러 결혼이 깨졌던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이었던 레이첼은 로스의 무의식 속에서 언제나 '나의 신부'였던 모양이다. 그녀와 사귀고, 그녀와 죽도록 싸우고, 그녀와 헤어지고, 그녀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이제 행복의 길로 접어들려는 찰라에, 그녀의 이름이 결혼식장에서 나왔던 것이다. 우리의 인드레이도 같은 실수를 한다. 그 달콤한 언어로 결국은 마리아를 굴복시키고 이제 엘레나를 극복하고 사랑의 완성을 이루던 그 중요한 순간 안드레이는 마리아 대신 엘레나 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양다리의 최후는 이렇듯 허무하다. 바람을 필 때, 양다리를 걸칠 때, 과거의 연인을 극복했을 때, 실수를 조심해야 한다



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감정을, 오래된 이미지와 새로운 이미지를 비교할 수 있다는게 미묘한 즐거움을 줘 212


어떤 곡이 단조에서 장조로 바뀌거나 비통한 불협화음을 이루었다가 여러 소절 지난 뒤에 기본음조로 돌아오듯이 그 목소리가 때때로 변화했다 바로 여성적인 음색이 될 때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말이 리듬이나 억양의 음악적 가치를 가지면 가질수록 상징적인 가치는 잃게 되었다 실제로 몇 분간 집중하고 나자 마음이 신비한 매력에 굴복했다. 그리고 악기로 연주된은 멜로디처럼 부드러운 억양이 필기를 기다리고 갈망하며 가만히 멈춰 있었다. 213


완전히 파멸 하고 싶은 유혹 같은 걸 느낀다 지금이 밤에 이 정적 속에서 내 영혼에 힘을 모두 끌어 모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외칠 수 있다면 이 무거운 짐을 가슴속에서 덜어내고 목에 걸려 숨도 못 쉬게 하는이 응어리를 풀 수 있을 것 같다 292


어째서 그 모든게 순식간에 모두 흩어지고 사라져 버린 걸까 어째서 그 불꽃을 마음 속에서 키울 수 없었던 걸까 어째서 그 기억을 간직하고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걸까 그러니까 그의 원칙은 변하기 쉬웠다. 그의 마음은 액체처럼 유동적이었다. 그의 모든게 쉴 새 없이 변형되고 변질되었다.  정신력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정신의 본질은 모순으로 이루어졌다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