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무언가를 강제하는 힘이다. 폭력의 주체는 힘이 강한 쪽이고 대상은 힘이 약한 쪽이다. 물리적 힘 뿐만 아니라 권위의 힘이나 금전의 힘, 사회적 위치의 힘도 폭력의 수단이 된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의 의지는 그녀가 나서 자라온 환경에서 축적된 폭력의 상처에서 기인한 듯 보이는데 그것은 폭력의 치유가 아닌 또다른 폭력을 야기한다. 이 폭력은 이제 '영혜를 위해'라는 이유로 영혜를 제외한 모든 타인들의 묵인 내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제 세상은 그녀에게 강제로 입을 벌려 고기를 먹이려 한다. 화해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고립을 선택한 그녀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 이것은 다시 의료행위라는 폭력과 만난다. 그 폭력 앞에서 영혜가 홀로 대치하는 수단은 완강한 거부 외에는 없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적인 의료 행위가 의료 대상자의 의지에 반한다면 강제로 호스를 목에 넣어 영양식을 주입하고 토해내지 못하도록 다시 또 피부를 찔러 잠드는 약품을 주입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는 것이 보잘 것없는 죄의식의 탈피이건, 상처의 봉합이건, 혹은 이상의 실현이건 간에 타인이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옹호되는 동안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둠으로써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생명의 소멸을 왜 사회가 용납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이 생명존중이라면 그 생명은 누구의 것일까. 숭고한 의료행위'와 폭력 사이의 경계는 무엇일까.
세 개의 단편 소설은 남편과 언니와 형부 세 사람의 다른 시선이 바라본 영혜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지 않은 영혜는 타인에 의해 관찰된 모습으로만 독자에게 전달된다. 처음으로 만난 영혜는 남편이 만든 몰개성하고 평범하고 매력없는 여자라는 틀 속에서 관찰된다. 어느날 갑자기 끔찍한 꿈과 함께 찾아온 그녀의 강박적 채식주의 행동은 어린 시절 물린 개를 잔인하게 죽이던 아버지의 동물 학대를 회상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한 점의 고기를 먹이려는 아버지의 폭력은 딸의 건강을 염려하는 부모의 애닯은 마음과 가정 내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지켜져왔던 권위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다리기를 타지만, 곧 자해로 맞서는 저항 앞에서 파경의 수순을 밟는다.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폭력이 원하는 힘에 복종하는 것이다. 인간이 비겁한 이유다. 비겁하지 않으려면 힘이 있으면 된다. 힘을 기르면 폭력에 당당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에는 칼이나 총을 이용하여 맞설 수도 있다. 영혜는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칼을 들었지만, 그 앞에는 또다른 이름의 폭력이 버티고 있다. 잔인하게 개를 죽이고, 아이를 체벌하던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윤리성 앞에서 그녀의 칼이 향한 곳은 자기 자신이다. 다른 방법은 회피하는 것이다. 도망가고 피하는 건 폭력 뿐만 아니라, 피곤하게 얽히고 복잡하게 말려드는 온갖 종류의 관계의 엉킴에 대응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아무 이유없이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인터넷 댓글러들로부터 가장 안전한 세상은 오프라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댓가는 뒤따른다. 세상 관계는 오프 스위치를 누르면 경쾌한 윈도우음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인터넷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문자와 톡 알림음 알림음같이 매 순간, 모든 공간, 마음 어딘가의 구석구석에서 끊을 수 없는 망을 통해 무수히 많은 관계들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는 고립을 대안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그녀는 순종했고, 그 다음에 맞섰고, 그리고 피했다. 고립을 선택한 그녀는 천천히 나무가 되어 가기로 한 듯 보인다.
2부 <몽고반점>에서 영혜는 그녀를 욕망하는 형부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섬뜩한 느낌의 1부 <채식주의자>에 비해 2부는 보다 관능적이고도 도발적이다. 가계 경제를 안정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상냥하고 다정한 아내가 있는 예술가로서 예술적 영감과 욕망 사이에서 번뇌하는 형부는 고요하고 신비한 느낌의 영혜를 남편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무엇이 먼저였을까. 예술적 영감이 육체를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다면, 혹은 육체적 욕망이 예술적 영감을 자극한다면 처제를 향한 육욕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남편에게 영혜는 이제 배우자로서의 자격으로 세워놓은 지극히 평범함이라는 이기적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므로, 당연한 수순처럼 이혼당하고, 그 거부당한 육체는 재활용되듯 형부에게 욕망된다. 처제의 엉덩이에 아직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한 마디 말에 성적인 자극을 받은 형부는 영혜의 몸을 집착적으로 욕망한다.
단지 하룻밤 사이에 꾸었던 지독한 악몽으로 인해 간단히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 고기 거부는 이후 존재감없이 순종적인 무채색의 영혜를 둘러싼 타인들의 몰이해와 욕망과 이기심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고기 거부 이후 시작된 영혜의 본능적이고도 충동적인 변화는 1부와 2부에서 두 남자의 욕구와 욕망을 통해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또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이 감각적으로 채색된다. 채식주의와 음식거부의 근원에 폭력과 죄의식이 함께 내재해 있었음을 눈치채는 것은, 영혜를 가장 따스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다른 방법으로 폭력에 대응했던, 함께 자란 언니 뿐이다. 남편이 요구한 영혜와 형부가 욕망한 영혜가 서로 다른 시선으로 서로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기대되는 동안, 언니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 자신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푝력의 본성을 성찰한다.
두 자매의 가정을 파멸로 이끈 영혜의 채식주의는 영혜의 언니의 시점에서 쓰여진 3부 <나무불꽃>에서 음식거부로 심화된다. 피를 토하고, 욕창이 생기며 몸은 자신의 몸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먹는 것을 거부하는 그녀는 스스로 소멸하여 나무가 되기를 소망한다. 언니를 통해 말해지는 영혜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과 이 모든 행동들에 어떤 합당한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지만, 1부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아버지의 폭력이 어린 시절 기억의 바닥 속에 여전히 켜켜히 쌓여있는 어떤 무의식과 연결되어 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아이에게 가해지는 부모의 물리적 폭력은 비겁함으로 막을 수 있는 것도, 맞대응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도, 도망가서 피할 수도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작은 온몸으로 온전히 수용하여 그 아픔과 모멸감과 상처와 분함을 차곡차곡 쌓아 차마 누군가 눈치라도 챌 새라 깊숙히 숨겨두고, 꾹꾹 눌러 자아가 되고 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남편에게는 색깔없던 영혜와 형부에겐 총천연색이었던 처제 사이, 그리그 그 사이 어떤 이유로 영혜를 필요로 했던 무수히 존재하는 영혜의 파편화된 영혼을 순간순간 비춘다. 그리고 그녀, 죄의식으로부터 탈피하고 나무가 되기로 작정한 영혜를 의료행위라는 폭력에서 구해내올 수도, 그렇다고 몸속의 모든 양분을 소진한 채로 음식을 거부하며 죽어가는 영혜를 현실 세계로 다시 데려오지도 못한 채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는 내게 영혜의 또다른 얼굴로 비쳐진다.
원문작성 : 예스24 서점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