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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소설

[발자크] 골짜기의 백합 - 위선자의 사랑

[도서]골짜기의 백합

오노레 드 발자크 저/정예영 역
을유문화사 | 2008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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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쓴 긍국적인 이유가 다 빚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빚을 갚기 위해 엄청나게 써댔다. 뭘 잘 모르면서 사업을 하면 평생 고생이다. 인쇄업의 실패로 엄청난 빚을 진 그는 하루 열여섯시간동안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20년동안 100여편의 소설이라는 결과가 그의 작업을 설명한다. <인간희극>이라는 총서는 그가 자신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종으로 횡으로 엮여 혁명의 시기에 프랑스가 거친 모든 면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고, 거대한 역사의 한 기록으로 남긴 기획이다. 고리오 영감을 비롯해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대부분의 소설이 인간희극 총서의 한 부분이다. 낭만주의 시기에 태어나 사실주의 소설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소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묘사, 그 중에서도 사랑에 대한 감정에 대한 묘사와 찬미가 엄청나게 많은 걸로 보아 낭만주의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불우했던 부모와의 관계, 불륜, 주인공의 정치적 행로 등에서 발자크 자신의 삶이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거의 처음부터 끄타지 한 남자의 순애보를 그린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심약한 주인공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리고, 또한 주머니는 빈 채로 이리저리 여러 학교를 떠돌먼서 가는 데마다 천덕꾸러기에 왕따가 되는데, 어느 날 부르봉 왕가의 귀환이라는 환영행사에 루이 18세가 행차하는 축제에서 처음 보는 귀부인에게 반해, 어깨에 키스를 퍼붓고는 따귀도 안맞고 그녀를 잊지 못해 병까지 얻어 골골하다가 시골 어느 성에 요양차 가던 중 아름다운 골짜기에서 퍼져오는 백합 냄새를 맡고 그 골짜기에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여인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불륜 모드가 전개된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찬미가 지나치다 싶어 읽을 때는 지루한 부분이 엄청 많았고 또한 두 사람의 관계 자체가 아이같은 상태의 젊은 남자와 남편을 둔 귀부인의 정신적인 사랑을 다룬 내용이라 읽기에 지루한 낭만적 묘사가 거추장스러웠지만, 끝까지 읽다보니 역시나 책은 끝까지 읽어야 작품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팰릭스가 사랑하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하는 착하고 정숙하고, 성숙한 여성이어서, 철딱서니가 조금도 없어보이는 20세의 팰릭스가 사랑하기에는 너무나도 먼 당신이다. 게다다가 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상대하는 동안 클로슈구루드(백작의 집)에 팰릭스가 매일 백작을 만나러 방문하는 형태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백작이 워낙에 고집스럽고 괴팍스러워서 살살 비유를 맞춰가며 카드놀이에 져주는 형태로 친분을 쌓고, 백작이 먼저 잠이들면 백작부인과의 밀회를 즐기는 형태로 진행된다. 아이가 둘 씩이나 있는 15세쯤 차이나는 백작부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너무나도 처절하게 그의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했기 때문에 결핍된 모성애를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끊임없는 애정 공세에도 부인은 아이를 달래듯, 둘 사이의 선을 확실하게 긋는 듯하며, 자신의 그에 대한 사랑을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신체적 접촉은 손등에 키스하는 일 뿐이며, 그 행위 역시 부인이 먼저 내밀어야 가능하다. 앞에서 <인간희극>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통해 혁명기의 프랑스의 모든 부분들을 다루고자 했다고 말했는데, 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귀환한 부르봉왕가와 왕당파들의 부활을 다룸으로써, 당시 그토록 거셌던 변혁의 역사 속에서 한 인간, 그리고 인간 무리들의 삶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영향을 받으며 변화했는지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실제감을 부여해준다. 혁명의 불길에서 교수대까지 올라갔다 살아남은 사람의 후손으로 유서깊은 가문 출신의 모르소프는 변변치 못한 재산에, 망명 생활동안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유산을 상속한 르농쿠르 집안의 딸과 결혼해 대규모의 영지를 소유자가 되어 클로슈구루드 저택에 살고 있지만 망명시절동안의 비행으로 떳떳치 못한 병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병을 두 자식에게까지 전해, 클로슈구루드에 사는 백작 부인은 두 아이와 남편의 병구환을 하면서 거의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한도 끝도 없이 앗아갔던, 그토록 갈망하던 역사의 변화가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져내리고 반동적인 부르봉 왕조의 귀환을 그 혁명의 영향으로 몰락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귀족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는 점은 시대를 다각도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귀족이라는 가문 덕에 분에 넘치는 여자를 만나, 거대한 영지를 얻게 되는 것에서도 모자라, 각종 연금과 망명 보상등을 손에 넣게 되는 모르소프 가가 부활하는 모습은 허망하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어쨌든 구질구질한 망명생활의 끝에서 무료하고 힘겨운 고립 생활을 할 때, 갑자기 요양차 나타난 팰릭스의 존재는 백작 뿐만 아니라, 백작 부인과 두 아이들에게도 반가운 생동력을 준다. 대부분의 불륜 소설이 정신적인 단계에서 시작해서 두 사람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단계에 이르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서는 팰릭스와 부인의 관계가 모성애에 기반한데다가 팰릭스가 부인을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존중하기 때문에 도무지 진전이 없다. 때문에 부인이 과연 그를 사랑하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는데,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를 출세로 이르게 도와주고, 그를 그 시골 구석에서 떠나보내고 길고 긴 편지로 답장을 하는 등의 내용을 보면 괴팍한 남편 때문에 그에게 약간 의지를 하지만, 너무 애여서 연인적으로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고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펴주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스무살 청춘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몸도 멀리 떨어져있고, 게다가 신체적 접촉이라고는 손등에 키스밖에 허용되지 않고, 사랑의 언어 역시 부인의 요청 때문에 마음대로 부릴 수 없어 들판에 핀 온갖 종류의 다른 향과 색과 모양을 가진 수많은 꽃을 꺾어 그 다발로 사랑의 언어를 대치하던 그로서는 젊은 여자들의 육체적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결국 그는 또다른 영국 출신의 귀족 부인과 육체적 연애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단지 끈질긴 유혹에 대한 굴복이며, 마음만은 언제든 모르소프 백작 부인에게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다. 


반전은 여기부터다. 소문은 들은 모르소프 백작 부인은 이제 그를 거부하게 되고, 영국인과의 육체적 사랑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오매불망 모르소프 부인만을 그리던 그는 부인이 병이 나서 다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야 부랴부랴 그녀를 만나러 파리를 떠난다. 그의 도착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감쪽같이 나아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부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토록 육체적 사랑을 거부하고 정숙했던 여인은 연인의 새로운 연인의 출연과 그 둘 사이의 뜨거운 육체적 결합이라는 계기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그녀는 이제까지 주체할 수 없었던 욕망을 드러내지만, 그런 모습을 지켜본 팰릭스의 시선은 독자에게 다시금 반전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어떤 여인에 대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여인은 알고보니, 주인공의 새로운 애인이다. 주인공이 무슨 이유로 새 애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써서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사랑이었던 모르소프 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뜨거운 영국인과의 육체적인 사랑 그 두가지 모두를 갖춘 새로운 사랑에 대한 충족감으로 혹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을 것 같은데, 당연히 과거에 파묻힌 남자를 누가 좋아하나. 꺼지셈. 하자, 그의 사랑은 이도 저도 아니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