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허공에 떠다니는 언어라는 소리들의 집합을 체계화하고 개념화시켜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고 가나다, 아야어 이름을 붙이고 소리와 글씨를 결합한 위대한 작업의 발상이 어느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의 경외감. 처음으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존경을 품었던 그 때 이래로 세종에 대한 나의 마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초등 학교를 들어가고, 조금씩 사회라는 과목 속에 들어 있는 역사 라는 부분을 접하면서 업적 위주의 내용이지만 세종 때 이룬 수없이 많은 과학적, 지리적, 역사적 성취들에 대해 알아가면서, 알면 알수록 그 분은 내게 우상으로서 너무도 완벽했다.
이 책을 읽기 전, 마지막으로 접한 세종은 팬픽에 가까운 소설을 드라마화한 [뿌리깊은 나무]에서 똥지게를 지고 혀를 차며 "제기랄" "지랄" 이라는 구수한 언어를 구사하던 한석규가 연기한 모습이었다. 한석규는 그 때, 부드러운 웃음 속에 감추어진 세종의 카리스마를 완벽하게 연기했다. 내겐 안개 속에 쌓여 있던 신비하기만 했던 그 영웅의 이미지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조금 더 푸근한 모습으로 세종에 대한 막막했던 이미지에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살인자의 자식이었어도 오히려 피를 거스른 정의를 향한 절개가 높이 평가되었고, 많은 첩을 거느린 바람둥이 기질은 오히려 로맨티스트로 읽혔다.
실록을 바탕으로 조선의 백성들의 삶을 엿보는 형식으로 쓰여진 [조선백성실록]은 거의 반 가까이가 세종의 일화로 가득차 있다. 유난히 더 백성들을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알려진 것처럼 너무 일벌레라서 모든 일을 직접 챙겼어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유별나게 실록에서 민초들의 삶을 찾고자 했던 저자의 눈에 세종 때의 일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유난히 세종의 일화만을 고른 것도 아닐텐데, 민초들과 관계된 작은 사건 하나 하나를 모두 챙긴 덕에 실록에 그 때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적혀졌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나는 상상력에 조금 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찬란한 문화 유산을 만들어내던 세종의 시기에도 굶고 핍박받는 민초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그대로 실록을 통해 전해졌다. 그 시대에 흙을 먹는 백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세종이 도성과 인근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 하기도 했으나, 내놓은 대책 중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 있었다니. 그나마 나라의 굶어 죽는 사람들의 상황을 일일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는 그 사회적 시스템이 오히려 더 놀라울 뿐이다. 세종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다각도의 연구를 지시했고 여러 구황작물과 도라지 가루, 칡뿌리 먹는 방법 등의 기술을 보급시켜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했다. 진정한 민생 돌보기란 이런 것이리라. 알고 있어 보이는 몇 안되는 단어 중 하나인 '민생'을 앵무새처럼 말로만 반복하는 공주님의 민생이 아니라..
세종의 재위 기간 중 이룬 눈부신 과학 기술적 업적과 휴머니즘 속에 스스로 과소 평가하고,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던 4군 6진, 여진을 몰아 내고 세운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오늘날까지 이어진 국경선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역사적 현장에는 비애가 있었다. 세종의 비애가 세종의 백성의 비애가.. 나라를 위해 영토를 넓혔으나, 그곳에 심어놓은 자신의 백성이 필요했고, 그것은 성군 세종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강제 이주'라는,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어이없는 강압적이고 극단적 정책이 필요로 되었다. 고향을 등지고 춥고 낯선 땅으로 가야 했던 그들은 저항했고 저항했고 또 저항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 아들을 죽이려고 까지 하였다. 먼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질 자국의 이익과 맞바꿔야 했던 민초들의 희생. 세종은 고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는 강제 이주를 계속 시행했다. 그 땅 역시 많은 군인들의 목숨과 맞바꾸어 지켜내고 확보한 조선의 새 영토였고, 그 곳을 확고한 조선의 영토로서 실효적 지배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돌아가신 전 노무현 대통령이 FTA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농민에게 계란 세례를 직접 받고, "맞아야 되는 거면 맞는 거 아니겠습니까"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 땐 세계화만이 살 길이고 "나라를 위한 일"로 규정지었어야 했다. 또 이라크 파병에 직접 방문한 후 차로 돌아와 눈물을 훔치던 모습과도 겹친다. 대의를 위해 했어야만 했던 일. 그래서 많은 저항을 직접 부딪치고, 처벌하고 돌아서 훔친 눈물은 얼마일까. 그렇게 해서 지켜온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 그것을 북한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 세종이 그토록 자식같이 생각했던 백성들의 희생 위에 가슴아프게 지켜낸 국경선을 언젠가 밟아볼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말레이지아 여행중이었다. 이슬람 국가이자 동아시아의 허브에 위치한 탓에 다양한 종류의 이슬람 문화들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특히 말레이 여성의 의상인 히잡(머리와 목 가슴에 두른 스카프)과 페르시아 아랍 계통의 눈만 빼놓고 전신을 까만색으로 가린 부르카 의상을 접하면서, 조선시대의 여성이 받던 차별과 박해를 생각했다. 잘은 모르지만, 80년도 이전에는 이란에서도 자유롭게 여성이 머리카락을 내놓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하는데, 자유를 향한 민중의 의지가 엉뚱한 구테타로 결론이 나면서 이란의 변태 남성 정치인들이 여성의 머리카락이 남성의 성욕을 자극한다고 금지시킨 이후로 공공장소에서는 스카프를 착용하는 것을 법제화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유생들이 사대부 여성에게 쓰개치마를 뒤집어 씌운 변명도 비슷했다. 그래도 그 때 썼던 쓰개 치마가 오늘날의 이슬람 국가에서 쓰는 부르카 보다는 융통성이 있었던 듯 싶다. 실록은 사대부들이 쓰개치마를 쓰고 다니는 것을 잘 안지킨다며 몇 몇 왕조를 통해 몇번이나 법령을 내렸다. 이 어처구니 없는 유교적 발상을 폐쇄된 세상에 살던 조선의 여인들은 슬기롭고, 가볍게 무시했으리라고 적혀 있다. 어쨌거나, 조선 중기까지는 이혼도 자유 연애도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로왔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흰색 스카프를 두른 아랍인들과 유목을 하며 양과 가축을 키우는 몽고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그 이후 민족이 걸어온 폐쇄적 선택이 못내 아쉽다. 우리가 우리보다 후진국으로 알고 있는 말레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프르를 비롯한 몇 몇 도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수 많은 피부색과 관습 의상 언어를 품고 사는 나라, 눈만 빼놓고 손과 발까지 전신을 까만색 부르카로 가리는 사람과 끈나시와 숏팬츠 차림의 여성들이 평화롭게 교차하는 나라. 여행 내내 자꾸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뿌리 깊은 조선의 폐쇄성과 비교되었다.
조선 중기를 넘어가면서, 자국의 문을 점점 닫은 채, 다른 문화를 수용하지 않고, 여성에게서는 자유를 빼앗고 사대부들의 권력 싸움에 열중하는 동안 왜란과 호란을 겪고 풍전등화같은 운명에 나라를 맡겨 스스로 패망해갔던 조선.. 역사는 돌고 돈다는 진실을 아직도 외면하고 있는 자들의 무례하고 허무한 외침에 매일 TV 뉴스 채널을 맞춰 귀기울여야 하는 민초로서, 나는 아직도 굶주린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따뜻하게 녹여줄 대책을 강구하라 신하들을 들볶을 것 같은, 나의 역사적 우상, 세종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