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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실용

[몰리 와이젠버그]홈메이드 라이프

어릴 때 먹던 음식 중에는 어른이 되었을 때 전혀 먹을 기회가 없는 음식들이 꽤 있다. 내가 몰리였다면 어떻게든 레시피를 주어 모으던지 스스로 수십번의 티라이얼 에러를 거쳐 고향의 맛을 완성하는 레시피를 재현해 냈을 텐데. 몰리의 이야기 덕에 나에게도 어느새 추억 속의 맛이 오래된 사진처럼 먹던 장면으로 기억되고 재생된다.

 

 

음식은 삶 자체에 가깝다.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거나 손질하고 만들고 먹고 얘기하고.. 음식을 가릭느 매운 것 가시달린 생선을 못먹는 음식이라 여겼던 초등시절 도시락엔 계란지단과 김과 소세지부침과 두부조림이 빠지지 않았다. 요들송을 잘 부르던 참 예쁘게도 생겼던 6남매중 막내인, 개구장이 친구 하나가 늘 함께 밥을 먹었는데 함께 조잘대며 먹던 점심시간의 풍경은 빛바랜 예쁜 사진처럼 곱게 내 마음속에 자주 걸려있다. 그 애가 생선 조림을 싸오던 날은 저도 조막만한 손으로 손수 가시를 발려주었다. 자기는 입속에서 가시를 발릴수 있다며 깔깔깔. 매운 김치를 조금만 먹어보라며 깔깔깔. 그 아이는 중1때 거리에서 우연히 감격의 재회를 한 후로 니집 내집을 드나들며 잠시동안 더 어렸던 시절을 추억하며 한단계 높은 여자들만의 우정으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돌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그 때 그 애와 예쁜 원피스를 입고 폴짝 폴짝 뛰어다니며 함께 장난칠 궁리를 하고, 둘만 킬킬거리며 머리를 맞대고 먹던 도시락의 단골 반찬들. 그 애의 도시락의 생선조림,  그애의 김치. 소식을 듣고 생각난 건 어릴때 뒤돌아 함께 먹던 도시락이었다. 동화같은 장면이었고, 영화같은 이별이었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막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에 처음으로 죽음을, 처음으로 사랑하는 친구의 영원한 떠남의 실체가, 그 한없는 그리움이 불쑥 불쑥 삐집고 나타나는 것의, 어찌는 해 볼 수 없는 너무나 보고 싶음을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추운 겨울 납작한 알미늄 도시락에 김치를 밑바닥에 깔고 그 위에 밥을 얹는다. 70명이 공존하는 생활공간에서 하루 15시간씩 숨쉬던 공간에서 여러 장의 연탄을 넣은 연통 달린 작은 난로 하나로 12월과 2월 영하의 혹독한 날씨를 견뎌야 했던, 오로지 대입 밖에는 다른 삶의 목적이 끼어들 자리가 없던 시절에 김치가 깔린 알미늄 도시락을 최적의 상태로 뜨겁게 데우는 일은 유일한 삶의 진짜 목표인 듯이 보였다. 70개의 도시락을 공평하게 순서를 바꿔가며 데우는 일은 주번이 담당했다. 그 때 주번은 권력자다. 둘째시간부터 시작되는 도시락 데우기는 신김치가 말캉하고 쫀독하게 익으면서도 약간의 누룽지는 허용하되 절대 까맣게 타서는 안되며 먹는 시간에 최고 따끈따끈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게 계획적으로 난로 위에서의 위치를 선점해야 했다. 가장 성공적인 김치도시락 데우기가 완성되면 가장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얼음처럼 찬 밥이 김치국물증기에 데워지고 녹여지면서 부드러운 맛을 가지게 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뜨거운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천국은 따로 없다. 비비고 섞으면 오늘날의 김치볶음밥과 맛이 비슷해지지만 김치도시락은 비교 불가능의 맛을 가졌다. 일단은 기름기가 없고, 뜨거운 난로 위로 겹겹이 얹어진 도시락들의 열기로 뭉군하게 오래 데워지는 과정에서 밥과 김치는 어떤 화학적 변화 과정을 겪는 것 같다. 그 시절의 난로와 겹겹이 높게 쌓여진 알미늄 도시락의 배열과 주번과의 친분이 만들어내는 특별 배려와 낙서 투성이의 낡은 책상들을 여러 개 동원해 나란히 붙이고 식탁으로 재탄생시켜 추운 겨울 고락을 함께 하던 수다쟁이 여고생들과 그 맛에 대한 특별한 공감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재현 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이 지나쳐온 그런 맛이었다.

 

몰리의 이야기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가족과 자신, 사랑과 우정과 일과 삶이 요리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때론 달콤하고, 때론 매콤하고, 때론 새콤하고 가끔 톡쏘기도 쌉싸름하기도 한 맛을 주었다. 사랑과 결혼도 요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삶은 요리이고 음식이고 추억이고  관계와 사랑을 이어주는 끈이다. 참 행복하다. 맛있다. 근사한 사진 한 컷이 없는 난생 처음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요리 레서피가 이렇게 챕터 하나하나 마다 에세이 사연 하나하나 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군침을 삼키게 하는 이 특별한 재능을 오랑제떼 블로그로도 만날 수 있었다. 요리의 사진이 아쉬워 찾아들어갔는데 아니 월드스타급의 슈퍼파워 블로그가 이렇게 깔끔할 수가.

 

근사한 사진이 없어도  글은 빛났지만, 어쩌면 사진이 없어서 글이 더 빛났을 지도 모르지만. 각 레시피에 소개되는 이야기처럼 작은 사진 한 컷이 아쉬워서 오랑제떼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