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밖 여운/소설

[줌파 라히리]축복받은 집

guiness 2015. 2. 1. 03:14
줌파 라히리는 1967년생, 뱅골 출신의 이민 2세로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2세 이후 쭉 미국에서 산 미국 사람이다. 그녀는 단편집 <축복받은 집>으로 1999년 소설가로 데뷰하고 그 이듬해 200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미국인의 정체성을 파고드는 장편 위주의 중견 작가에게 주어졌던 퓰리처상이 신인이며 이민자이며 단편작 모음에 퓰리처 상을 수상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한 마디로 축복받은 재능으로 축복받은 작가이다.

 

축복받은 집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이 집의 구성원에게 어떤 결핍이 내재된 집. 그것들을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구성원. 그 곳 부부들은 가슴을 적시는 뜨겁고 절절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하루 일상으로서 어쩐면 서로에게 가구처럼 늘 그자리에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가정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 실린 대부분 단편들은 함께 인도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상실과 이민자로서의 이방인의 낯선 시선 이질감과 특히 문화적 상실감이 짙게 배경으로 드리운다.

 

내가 읽은 책이 2001년도 동아일보 판이어서 그런지 저자에 대한 약력이 허술해, 서핑을 해보았으나 신통한 게 없어서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찾아보았다. 소설집에는 9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내에서는 <축복받은 집>이라는 소설 이름으로 책 이름을 지었지만, 원서에는 <질병의 통역사>(원제  Interpreter of Maladies)를 제목으로 삼았다.

 

질병의 통역사

 

미국 관광객을 태운 인도 현지 가이드가 코나라크 라는 힌두교의 유적지 태양 신전을 보러 가는 길이다.   관광객은 인도계 미국인 가족. 현지 사정과 언어 문화에 어둡고, 서구화된 미국적인 의상과 언어, 행동을 한다. 한때 외교관의 통역을 꿈꾸었던 카파시는 질병 통역사라는, 병원에서 환자의 증상을 통역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찮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가족을 부양한다. 외국어에 능숙한 덕분에 관광 가이드라는 사이드 잡을 가졌다. 카파시가 태운 관광객 다시씨 가족은 카파시가 보기엔 서로 전형적인 <가구>다. 남자는 가이드북에 물두하고, 여자의 눈빛은 선그라스 속에 감추어 있지만 가이드에게 인간적인 흥미를 보인다. 부부는 말이 없다.

 

이 단편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건 바로 이거다. 남편에게 가구인 한 여자가,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구도 하찮게 여기는 자신의 직업을 인정한 것이다. 질병 통역사 카파시는 여자가 자신에게 보인 관심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착각의 세계의 빠져 들어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그의 상상은 우습지만 슬프다. 그래서 이야기는 코믹하면서도 짠하다. 그 관광객 부부가 호의를 보이며 함께 사진을 찍고 주소를 메모하는 순간부터 그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아 그의 상상적 로맨스는 멀고 먼 달콤한 미래에 닿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하찮은' 질병 통역 일을 '로맨틱'하게 생각하는 여자를 만났다. 이제 그녀와 사랑하는 일은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행복하다. 차에 두 사람만 남고 여자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그에게 어떤 한 비밀을 얘기해 주기 전까지 그는 그녀와 함께 벌어질 어떤 일을 기대하며 충만해졌다. 그의 영혼은 짜릿하게 창공을 향해 비상했다.

 

카파시가 운전석 앞의 백미러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보는 그들 가족은 그의 시야 앞에 놓인 백미러에 의해 왜곡되어 보인다.  렌즈 없이 벌거벗은 눈으로 그녀와 그 가족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과 그 가족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깨닫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나 사소한 존재여서 제대로 모욕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116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끼게 되는 렌즈는 사물을 왜곡시켜 대상을 자신에게 편한 대로 해석하게 한다. 가까운 거리는 멀게 먼 거리는 가깝게 보여질 수도 있다. 인도의 생활고에 하루 하루를 고된 노동과 생활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살아가던 카파시에게 그 렌즈는 잠시동안 아주 잠시동안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착각의 깨달음에 대한 대가는 어떤 종류의 상처이고 어떤 종류의 아픔일까. 카파시와 다시 가족 사이에는 태평양 만큼 멀고 먼 문화적 차이와 경제적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백미러를 통해 공동된 언어와 같은 민족이라는 쉽게 건널 수 있는 마을 앞 시내처럼 얕고 가까와 보였지만 보였지만, 만날 수 없는 넓고 넓은 바다였다. 두 가족이 살고 있는 세계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였다.

 

미나는 썬글라스로 자신의 일부를 폐쇄한다. 그녀가 보낸 카파시에 대한 호의는 그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여서 그녀가 가진 출생의 비밀을 덜어버려도 상관이 없을 듯한 사람에게 보내는 예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힘든 비밀을 카파시에게 쓰레기처럼 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그곳을 뜨고 싶었을까. 그러면 조금은 가벼워질까. 그럴까. 카파시는 사람들에게 질병의 증상을 통역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너무나도 무거운 비밀을 그에게 통역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누구에게?

 

섹시

 

<섹시>는 짧고 흔한 스토리임에도 오랜 여운과 생각 거리를 준다. 흔하디 흔한 불륜 관계가 주제다. 여자의 사랑은 인도인으로서의 상실된 정체성을 배경으로 한다. 이제껏 인도의 문화와 생활에 관심도 없던 미란다는 애인을 통해 자기 이름이 반은 인도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남자의 인도적 정체성이 강할 수록 결핍으로 인해  생기는 문화적 이질감과 소외를 경험한다. 개인의 탄생과 성장 배경의 차이에서 생기는 차이. 그 속에서 생기는 이민족의 정서를 일탈적 사랑 속에 정교하게 녹여내었다. '그녀의 플롯은 너무나 질서 정연한여 정교한 수학적 증명을 연상시키는다' 라는 표지 뒷면의 찬사에 거짓 없이 공감하게 되는 단편이다.

 

 

대체로 바람둥이들의 특징은 자신과 상대방을 속이지 않는다. 다만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파트너만 속는다. 그들은 뻔뻔해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함으로써 상대를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가정과 배우자를 상대의 욕망의 경계선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겉으로는 가정을 보호하는데 성공하지만 사실상 자신을 보호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임자가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가는 고스란히 그 사람을 사랑한 사람만의 몫이다. 알고도 사랑한 죄, 이 소설에서 남의 사람을 품은 것에 대한 댓가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드라마틱하거나 신파적이거나, 충격적인 방법이지 않다. 그 댓가는 조용하지만 더 예리하고 날카롭고 그래서 더 훨씬 더 깊이 찌른다. 자신에 대한 자각. 자신에 대한 발견. 한 남자에게 한 여자로서 무엇이었는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아픈 자각이다.

 

주인공의 이름에서도 이민 2세로서의 문화적 혼돈이 반영된다. 미란다는 영어이름 이지만 인도계 이름 중 미라라는 이름과 섞여 있다. 미란다는 인도계 여성이지만 인도어를 할 줄도 모르고 인도에 대해 아무 상식도 없다. 그러나  강한 인도인의 정체성을 사진 데브를 사랑하면서 그녀는 인도 문화를 경외한다. 음식과 말과 글자와 그들의  신에 대한 의식, 이 모든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 하지만 이미 그녀에겐 모두 낯선 것들이다.

 

어떤 것은 글자라기 보다 숫자 같았고 어떤 것은 옆으로 누인 삼각형 같았다. 그녀는 여러번 시도한 끝에 책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절차로 자신의 이름을 써 낼 수 있었다. 중략. 그것은 그녀에게 한번 번 갈겨 쓴 글씨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미란다는 그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59 <섹시 중에서>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여자는 백화점에서 섹시한 이브닝 드레스를 산다. 그녀는 로맨틱한 저녁을 꿈꾼다. 2주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남자의 아내, 남자에게 일탈은 끝났지만 의무는 남아있다. 주말마다 아내에게 운동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오는 남자는 그녀가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볼 시간이 없다. 남자에게 여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 가장 섹시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언니의 형부가 바람이 나서 파경을 맞게 된 사실을 매일 매일 이야기하고 매일 언니에게 전화한다. 동료가 형부와 형부의 내연녀를 욕할 때, 그녀는 자기도 다른 여자의 남자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순간이다. 그 동료가 언니와 함께 외출하기 위해 베이비시팅을 맡기고, 그 아이, 그러니까 아빠가 바람나서 엄마가 매일 울고 있는 환경에 처한 아이와 함께 한 시간, 그녀는 아이를 통해 한 가족을 깨고 있는 자신을 본다. 우연히 옷장 안의 그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드레스를 본 아이는, 여자 주인공 미란다에게 입어보라고 조른다. 남자를 위해 옷을 샀지만 남자와 로맨틱한 이브닝을 가질 기회가 없어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드레스를 어쩌면 그 남자의 아이였을 수도 있었을 아이 앞에서 입어본다.

 

아이는 말한다. 섹시해요. 아이가 섹시하다는 말의 뜻을 알까? 아버지가 다른 여자에게 가버리기로 한 아이에게 섹시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아빠에게 다그치고 소리지르고 울고 하면서 그녀가 섹시하냐고, 얼마나 섹시하냐고, 따져물었을까. 한 아이의 아빠를, 한 가족의 부양자를, 한 여자의 남자를  빼앗아가 버린 섹시함. 그말의 의미를, 그 부부의, 그 가족의 아귀다툼 속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아이. 그 아이에게서 나온 섹시해요 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이제껐 무엇이었는지를 자각하는 여자. 한 번쯤은 만나서 헤어짐의 의식을 갖기를 계획하지만, 결국 그 헤어짐의 의식을 치를 기회마저도 오지 않는 걸 알아버릴 때의 초라함.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잠시 동안의 일 (중복등록)

 

우리는 밤이 낮처럼 환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 사람들이 밤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무 제약 없이 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실내에서는 밤과 낮이 구분이 없다. 이 때 갑작스레 발생하는 정전은 매우 특별한 이벤트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정전이 발생되면 동네는 축제 분위기다.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와 떠들고 시험을 앞둔 아이들은 잠시의 일탈이 즐겁다. 그러나 가구 같은 두 사람. 이제 어둠 속 그대 나  사이에는 흔들리는 촛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남자는 어둠속에 내밀었던 서로의 속내가 생활에 변화를 주기를 바랐다. 여자는 흔들리는 촛불 앞에서 의식을 치르듯 작은 진실들을 꺼집어 냈고, 남자의 그것도 보여달라고 했다. 남자는 그 정전 속의 진실게임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를 바랐고, 여자는 깊은 상처와 함께 관계를 떨쳐내기 위한 정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 부부가 처음부터 서로에게 가구였던  건 아니었다. 만삭이 될 때까지 여자의 배 속에서  싹을 틔어왔던 새 생명의 급작스런 상실은 그 부부를 가구로 만들었다. 며칠동안 예고된 저녁 시간의 깜깜한 정전이 가구 같던 두 사람 서랍을 열었다. 깜깜한 어둠속에 촛불이 오래된 가구의 손잡이를 더듬어 문을 열고 가구 속 더 어두운 상실의 슬픔을 어루만졌다. 진실 게임이 익숙해 질 무렵, 이제 가구가 아닌 사랑이 되어 서로의 몸과 마음을 생명으로 다른 수 있음을 기대하게 되었을 때 정전은 끝이 난다. 일탈도 끝난다. 진실 게임도. 어둠속에 촛불처럼 흔들리던 작은 기대도. 끝이 난다.

 

예고되었던 정전의 밤은 예상보다 일찍 끝나고,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정전 기간동안 그녀에게 품었던 실낱같은 희망이 얼마나 헛되었는지를 알고 깊이 분노한다. 그래서, 그는 비밀을 털어 놓는다. 그녀의 깊고 아픈 상처 뒤에는 마치 반전처럼 그 남자가 그녀를 향한 애정과 배려로 무덤까지 혼자 가져가려 했던 비밀 아닌 비밀이 있었다. 배 속에 있을 때까지는 숨쉬었던 아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이었을 때 그는 그 죽은 아기의 시체를 혼자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직접 묻었다. 그는 이미 상실로 넋이 나간 아내에게 모든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고 말하고 실재했던 싸늘한 아기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내를 사랑했기에, 그는 아기의 죽음이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혼자서만 확인하고, 그 죽음의 실존적 슬픔을 혼자만 감당했다. 

 

정전, 전기의 공급이 강제성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차단 역시 자유롭다. 불을 끄면 다시 세상은 어두워진다. 아내는 조용히 불을 껐다. 아-- 작은 탄성이 나왔다.   내가 읽는 좀파 라히리의 첫번째 단편이다. 두고두고 길게 여운으로 남을 짧은 단편..

 

진짜 수위

 

동 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방글라데시가 된 해가 1971년이다. 난리통에 부리 마는 가족과 집과 보석과 그 모든 것을 잃고 캘커타로 이주해 왔다. 그러니까 배경은 70년대에서 80년대의 캘커타라고 하겠다. 그녀는 낡은 연립 주택의 계단 참에서 기거하며 그 건물의 청소며 잡다한 일을 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주민들로서는 믿을 수 없이 허세 새로운 것들뿐이다. 전쟁 전 그녀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 호화 스러 웠던 과거. 가난한 그곳 주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호사를 누린 기억을 끊임없이 이야기 했다. 아무도 있지 않았으나 그녀의 존재가 연립주택의 관리면에서 해가 될 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주민들과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단편집은 리뷰 쓰기 힘들어..

 

개인적으로 나는 단편을 그리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짧은 단편 속 정교하게 계산된 메세지를 캐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라 읽은 후에 큰 감흥을 못받는 경우가 많아서다.  둔한 감각을 깨닫는 아픔은 유쾌하지 않다. 무엇보다 캐랙터나 배경에 익숙해질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게 가장 큰 단점이다. 작품집을 읽을 때는 하나만 읽고 거기에서 주는 여운에 충실한 후 그 여운이 가시면 다음 작품을 일는 것이 좋다. 이 소설집은 나의 단편에 대한 이런 선호도에 있어 예외적으로 좋았다.


 

쉽게 읽히고, 어려운 복선이 깔려 있지도, 곰곰히 그게 무슨 뜻일까 하며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은유적 행위도 많지 않다. 단순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이렇게 많은 생각들을 이끌어 내게 하는 줌파 라히리는 젊은 나이에 소설가로서의 처녀작으로 퓰리처상과 뉴욕타임즈 상을 수상했다.  일상적인 모습에서 내전과 가난, 이민 등의 문화적 충격을 지닌 시대의 자화상과 미국에 정착한 이민족으로서 겪는 아픔과 상실을 따뜻한 언어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