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밖 여운/교양
[2015 결산]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guiness
2015. 12. 15. 01:02
낯선 여인의 편지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여인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 149
마지막 문장이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중 슈테판 츠바이크 단편 두개가 실려 있는 이 책의 두번째 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작가 '그'에 대해 서술하는 유일한 문장이다. 낯선 여인이 보낸 길고 긴 편지를 읽은 '그'라는 존재에 대한, '그'라는 인격에 대한 작가의 유일한 시각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에게 보낸 낯선 여자의 편지 속에서만 생생하다. 편지 밖에서의 그, 조금 더 객관적인 그의 부재를 통해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평생을 사랑했던 여자의 시점이 쫓은 어쩌면 환상뿐일 지도 모를 모습 뿐이다. 그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13 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
이렇게 자신을 끝판까지 몰고 가는 사랑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언어의 마법이 그녀를 이해하게 한다. 자신을 알아보기만을 바라며 어떤 헌신도 마다하지 않은 매력적 여성의 한결같은 순애보 속에는 어딘지 여성적 수동성이 전제되어 있어 정치적으로는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리. 사랑이란 것의 본질이 어쩌면 자기 헌신과 연민, 슬픔 따위의 가학적 감정 없이는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 것을.
학창 시절 짝사랑에 빠져봤지만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상대방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주고받는 사랑의 기본 법칙이다. 내가 바라보는 만큼 나를 보지 않는다면 내가 반한 것만큼 내게 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마음 속 사랑이 떠날 때까지 인내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그러면서도 우물 속 물처럼 똑같은 생각은 끊임없이 퍼올려 버려도 끊임없이 솟아 고였다. 그런데 마찬가지. 이런 태도 역시 여성의 수동성이다. 애초에 채찍은 먼저 반한 사람이 상대에게 바친다. 남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낯선 여인'만큼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사랑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그를 향한 사랑을 철저히 숨기는 일이 왜 필요할까.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 비해 13세의 그녀는 너무 어리고 '못생겼'다. 감히 범접하지도 못할 대상이다. 수줍음은 그녀를 앞집에 사는 그와의 수많은 만남에 가림막이 되어 왔다. 이제 숙녀가 되고 아룸다와진 그녀가 왜 또 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그가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말하지 못하나. 그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편지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자유로운 당신을 구속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자기 때문에 마음 쓰일 일이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바람둥이인지라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그에게 닿늘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녀의 직감처럼 그리고 그녀의 간절한 소망과는 반대로 매번 인생 곳곳에서 그들운 마주치지만 매번 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그는 그녀를 처음보는 여성으로 그녀를 유혹해내고는 또다시 잊는다.
자 이제 왜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걸까. 아래 인용문은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읽으실 분은 여기서 멈춤 해 주세요.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이, 당신의 밝고 맑은 아이가 더 밑바닥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곰팡내 나는 음침한 곳에서 비천하기 그지 없는 골목길에서? 병균이 오글거리고 악취가 풍기는 후미진 뒤채에서 자라는 일이 없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의 부드러운 입이 시궁창의 말들을 알게 해서도 안 되며, 그 하얀 몸이 가난뱅이의 구질구질한 속옷을 걸치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부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당신에게로, 당신 삶의 영역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133
당신을 위해서 언제라도 자유롭게 남아있고 싶었습니다 134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거의 익숙해졌는데도 갑자기 그 사실로 인해 속이 타는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135
저를 결코 결코 알아보지 못한 당신. 물처럼 제곁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당신. 거리의 돌을 밟고 지나가듯 저를 밝고 지나가는 당신. 늘 멀리 떠나서 저를 영원히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제게 어떤 존재인가요? 한때는 당신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떠다니는 공기처럼 덧없는 당신을. 145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여인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 149
마지막 문장이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중 슈테판 츠바이크 단편 두개가 실려 있는 이 책의 두번째 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작가 '그'에 대해 서술하는 유일한 문장이다. 낯선 여인이 보낸 길고 긴 편지를 읽은 '그'라는 존재에 대한, '그'라는 인격에 대한 작가의 유일한 시각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에게 보낸 낯선 여자의 편지 속에서만 생생하다. 편지 밖에서의 그, 조금 더 객관적인 그의 부재를 통해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평생을 사랑했던 여자의 시점이 쫓은 어쩌면 환상뿐일 지도 모를 모습 뿐이다. 그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13 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
이렇게 자신을 끝판까지 몰고 가는 사랑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언어의 마법이 그녀를 이해하게 한다. 자신을 알아보기만을 바라며 어떤 헌신도 마다하지 않은 매력적 여성의 한결같은 순애보 속에는 어딘지 여성적 수동성이 전제되어 있어 정치적으로는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리. 사랑이란 것의 본질이 어쩌면 자기 헌신과 연민, 슬픔 따위의 가학적 감정 없이는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 것을.
학창 시절 짝사랑에 빠져봤지만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상대방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주고받는 사랑의 기본 법칙이다. 내가 바라보는 만큼 나를 보지 않는다면 내가 반한 것만큼 내게 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마음 속 사랑이 떠날 때까지 인내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그러면서도 우물 속 물처럼 똑같은 생각은 끊임없이 퍼올려 버려도 끊임없이 솟아 고였다. 그런데 마찬가지. 이런 태도 역시 여성의 수동성이다. 애초에 채찍은 먼저 반한 사람이 상대에게 바친다. 남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낯선 여인'만큼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사랑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그를 향한 사랑을 철저히 숨기는 일이 왜 필요할까.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 비해 13세의 그녀는 너무 어리고 '못생겼'다. 감히 범접하지도 못할 대상이다. 수줍음은 그녀를 앞집에 사는 그와의 수많은 만남에 가림막이 되어 왔다. 이제 숙녀가 되고 아룸다와진 그녀가 왜 또 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그가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말하지 못하나. 그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편지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자유로운 당신을 구속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자기 때문에 마음 쓰일 일이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바람둥이인지라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그에게 닿늘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녀의 직감처럼 그리고 그녀의 간절한 소망과는 반대로 매번 인생 곳곳에서 그들운 마주치지만 매번 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그는 그녀를 처음보는 여성으로 그녀를 유혹해내고는 또다시 잊는다.
자 이제 왜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걸까. 아래 인용문은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읽으실 분은 여기서 멈춤 해 주세요.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이, 당신의 밝고 맑은 아이가 더 밑바닥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곰팡내 나는 음침한 곳에서 비천하기 그지 없는 골목길에서? 병균이 오글거리고 악취가 풍기는 후미진 뒤채에서 자라는 일이 없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의 부드러운 입이 시궁창의 말들을 알게 해서도 안 되며, 그 하얀 몸이 가난뱅이의 구질구질한 속옷을 걸치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부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당신에게로, 당신 삶의 영역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133
당신을 위해서 언제라도 자유롭게 남아있고 싶었습니다 134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거의 익숙해졌는데도 갑자기 그 사실로 인해 속이 타는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135
저를 결코 결코 알아보지 못한 당신. 물처럼 제곁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당신. 거리의 돌을 밟고 지나가듯 저를 밝고 지나가는 당신. 늘 멀리 떠나서 저를 영원히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제게 어떤 존재인가요? 한때는 당신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떠다니는 공기처럼 덧없는 당신을. 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