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밖 여운/교양

고립은 자체적인 형태의 교제를 제공했다.

guiness 2001. 1. 1. 09:00

[도서]저지대

줌파 라히리 저/서창렬 역
마음산책 | 2014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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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계에서 <혼자있는 시간의 힘>이라던가, 때로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든가 하는 제목의 책들이 대세다.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 필요성과 자각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건지 반대로 서점계가 대세를 만들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그 고요한 시간에 대한 필요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홀로 있는 시간을 떳떳하게 주장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결론 내려본다. 1년 넘게 전에 읽은 책을 소환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고립은 자체적인 형태의 교제를 제공했다. 자신의 방의 믿음직한 고요, 저녁의 변함없는 정적,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게 될 것이며 어떤 방해도 어떤 뜻밖의 일도 없을 것이라는 약속 등이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들은 날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에 그녀를 반겨 맞았으며 밤이면 그녀 곁에 조용히 누웠다.376


얼마전에 <스토너>를 읽을 때도 그녀를 떠올렸었다. 책은 3인칭 시점이지만 가우리의 남편 수바사의 시점에서 주로 쓰였다. 가우리는 수바사의 아우 우디얀과 결혼했던 여자다. 형제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60년대 인도 캘커타의 한 마을에서 자랐는데 형 수바사는 순종적이고 책임감있는 <스토너>의 주인공과 같은 성격이지만 아우 우디안은 열정적이고 자주적이며 매력적인 성격으로 가우리와 사귀다가 결혼을 하지만, 혁명을 꿈꾸었고, 새신부 가우리와 뱃속의 아이를 홀로 남긴채 경찰에 쫓기다 저지대 늪에 숨어 숨진다. 우디안이 죽고, 가우리가 집으로 오자 자신의 부모는 가우리를 학대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가우리를 쫓아낼 것임을 알고, 가우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난다. 


수바시는 아우가 죽기 전 가우리를 감히 탐낼 수도 없을만큼 지적인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아우가 죽자 물론 아우의 아이, 아우의 여자에 대한 존중과 책임으로 결혼하지만, 그 역시 그녀와의 행복을 꿈꾸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씻지 못할 상실을 경험한 그녀는 형 수바시에게서 마음을 열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아기는 뱃속에 있었고, 의탁할 곳 없는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은 자신과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죽은 남편의 집에서 차가운 눈총을 받으며 아이를 낳을 때까지 캄캄한 어둠을 견디는 것 뿐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수바시는 아우의 죽음을 전해듣고 죽음 같이 음울한 상실의 집에서 가우리를 데려온다. 아우가 죽던 때부터 시간은 멈췄다. 수바시의 노력으로 가우리를 상실의 늪에서 건져올릴 수는 없다. 그만큼의 시간과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녀는 점점 책과 학문의 세계에 빠져든다. 처음에는 수바시가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을 이용하다가, 차츰 청강을 하고, 그러다가 진짜 공부를 하게 되고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세계에만 몰두할 수 있는 세계에 침잠하면서 그녀의 딸 벨라를 등안시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아우의 딸이자 자신의 딸이고 또 가우리의 딸이기도 한 벨라를 혼자 두고 강의를 다니거나 도서관을 다니는 것을 안 수바시는 크게 노하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둘의 사이는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태로 치닫는다.<스토너>를 읽을 때 답답했던 것처럼, <저지대>를 읽을 때에도 여자가 조금만 마음을 열고 노력을 한다면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의 깊은 상실과 두 남자의 차이, 그리고 결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설레는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을 인간의 감정을 알기에 여자를 이해할 수도 있었다.


어떠한 전망도 하기 힘든 현재의 순간만이 그녀의 이해의 범위를 벗어났다. 그것은 자신의 어깨 바로 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같은 것이었다. 시야에 생긴 공백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눈에 보였으며 감긴 실이 풀어지듯 계속 풀려 나갔다. 그녀는 그 미래에 눈을 감고 싶었다. 자기 앞에 놓인 날과 달들이 끝나 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의 남은 생애는 계속해서 현재가 되어 나타났고 시간은 끊임없이 증식했다. 그녀는 자신을 의지와는 반대로 미래를 예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늘 하루가 다음날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날로 이어 질 거라는 확신과 결합된 열망이었다. 그것은 숨을 참고 멈추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우다얀이 저지대 속에서 그렇게 하려고 했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시간이 가만히 있으면서도 동시에 흐르는 것처럼. 그녀가 자각하지 못하는 몸의  다른 어떤 부분이 산소를 빨아들이며 그녀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179


시간은 물리적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마음의 이해력 안에 존재하는가? 시간은 오직 인간만이 인식하는가. 어떤 짧은 시간이 몇 시간이 되는 것처럼 부풀려지고 1년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 단 며칠로 줄어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짝을 잃거나 먹잇감을 죽일때 동물도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가.

힌두 철학에서는 신 안에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했다. 신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이지만 시간은 죽음의 신으로 인식되었다 241



바로 그날 그녀는 드루에게 자신의 엄마에 대한 진실을 얘기해 줬다. 엄마는 떠났으며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한 사람과 같이 있기를 피해온 이유이고 한 장소에 정착하기를 피해온 이유라고 말했다.중략. 그가 찾는 것을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이유라고 했다. 477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자기만의 방과 1년에 500파운드의 정기적인 수입이라고 했다. 자기만의 방을 가지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이 없으면 돈을 벌어오는 남자와 방을 공유해야 한다. 소설에서 여자는 남자의 돈을 사용하며 남자와 남자의 형과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혼자만의 방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끝은 결론은 정해져 있다. 공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것이 받아들여질 리가 있는가, 그러나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뱃속의 아이 때문에 죽은 남편의 형과 결혼해 이민 온 그녀가 수동적으로 던져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환경에서 돈을 벌지 못하는 여자에게 글을 쓰려면 정기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녀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 방세를 낼 수 있는 정기적인 수입을 가질 수 있는 길을 가는 게 아니었을까. 그것을 위해 그녀가 한 선택은 사회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니기적이었고, 남편은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은 또한 둘 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게 문제다. <스토너>에서 십대의 딸이 임신을 하고 이른 나이에 떠밀리듯 결혼을 하여 남편을 잃고 중독자가 되는 것처럼 그녀와 죽은 남편 사이의 딸, 그리고 현재 남편의 가장 소중한 딸이자 생조카인 벨라 역시 자신의 부모가 가진 상처들을 고스란히 전달받는다. 부모와 우디얀, 수비야 그리고 벨라에 걸쳐 모든 사람들 각자의 삶, 각자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지만 우디얀의 죽음이 잔잔한 물속에 던진 돌멩이처럼 파장이 되어 오래도록 대를 이어 넓게 그 불행을 퍼뜨린다. 개인의 비극은 자주 역사의 비극 속에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