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밖 여운/교양

[세바스티앙 팔레티,김은주] 열한 살의 유서

guiness 2014. 7. 21. 19:29
 

분단은 현실이다. 휴전은 과장도 엄살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민족이 반드시 하나의 통치 체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통일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섬처럼 고립된 채로 김씨 일가 세습 수령들을 신으로 섬기고 기아와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하나씩 둘씩 가족이 죽어나가도록 단 한 발도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그 무서운 체제의 대립으로 인한 한쪽의 무지막지한 희생을 말하는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의 처치가 사회 이슈가 된 지 오래인 이 땅의 끝에 맞닿아 있는 바로 그 가까운 땅에서, 내 엄마와 내 할머니 세대 가족들이 함께 섞여 살던 그 땅에서, 숫자조차 세지 못할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우리 시대  참극이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 책은 돈을 받고 가이드 역할을 하는 조선족 사람들과 선교 목적으로 탈북을 돕는 몇몇 선교 단체 등의 민간 차원의 지원이 아니라면 벌써 오래 전에 북송되어 결국은 뼈가죽만 남은채 영양실조로 죽어갔을,  국제 원조 기관이나 정부의 도움 없이 여러 번의 실패끝에 아슬아슬하게 탈북에 성공한, 그저 흔하고 흔한 개인적인 탈북의 여정이자, 역사도 외면하고, 사회도 기억하지 않는 작은 사건 하나에 불과한 한 소녀의 9년에 걸친 탈북 과정의 실패와 재도전, 험난했던 인생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소련의 원조가 끊기고 미국의 경제 제재조치로 어려움을 겪던 북한 주민은 90년대를 넘기면서 계속되는 흉년과 함께 세계역사상 기록될만한 사상초유의 기근에 시달리게 된다. 11살의 소녀는 영양실조로 조부모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 엄마와 언니와 함께 거지 신세가 되어 온갖 역경을 딪고 하루 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간다.  어릴때 아빠 목마를 타고 영화관엘 가고 기차 여행으로 평양 구경을 하고, 그렇게 어려움 없이 지내던 평범한 가정에 차츰 배급이 줄면서 아예 끊긴 것이다. 김씨일가의 정권에 반대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왔기에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먹을 걸 구하는 방법도 모른채 속수무책으로 닥치는대로 살아가던 그들은 몇번의 시도 끝에 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안의 강제북송과 인신매매단들 뿐이다. 이들이 남한으로 오기까지 겪은 고초는 인간 한계의 끝과 몇 번이고 오간다. 함경북도 끝땅의 살을 에는 추운 겨울 얼음이 갈라져 물에 빠져 젖은 옷이 그대로 꽝꽝 얼어붙은 채로 공안의 눈을 피해 숨고 걷고 해야 했던 상황. 몇번이나 경험한 공안을 피하며 고비 사막에서 국경을 넘어 몽고를 향한 질주. 팔려간 중국 시골집에서 당하는 수모.

 

혁명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저 한 세대를 관통한 지식인들의 피튀기던 낭만이었나. 그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행해진 무수한 피의 댓가는 권력의 유혹에 모든 것을 무효화하고 체제유지만을 위한 달콤한 속임수에 무엇과 바꾸었나. 신화적 영웅은 어느 세기이건 어떤 민족이건  창조해 내는 대로 그렇게 쉽게 편리하게 먹혀들어가는 건가. 뭐 이제는 답답하지조차 않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다만 그들의 인생이 억울할 뿐이다. 굶어 죽어 나가면서도 끝까지 외치는 '위대한 수령님'. 그 공허한 충성의 외침이..

 

겉표지의 책띠에는 세바스티앙이라고 하는 프랑스인 기자와 공저로 되어 있고 프랑스와 노르웨이에서 먼저 출판된 걸로 나와있다. 불어 역자가 따로 있고 속표지에는 김은주 감수라는 설명을 봐서 초고는 불어로 쓰여진 게 확실한 것 같은데, 이 내용으로 봐서는 세바스티앙이 취재하여 고스트라이터로 쓴 글을 재번역한 것 같은데, 아뭏든 그 부분에서 조금 명확히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먼저 출간되지 않은 점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아마도 관심을 가지고 책의 집필에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만한 사람이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스토리 자체가 극적이고 극한 상황에 대한 묘사와 감정의 표현이 사실적이어서 번역체로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