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럴 W. 레이]침대 위의 신
섹스는 은밀하고, 사적이며, 개인적인 행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종교 안에서든 종교 밖에서든, 미숙하든 성숙하든 매우 개인적이인 일이며, 어느 문화에서건 마구 드러내 놓고 하거나 떠벌이지 않는다. 섹스의 속성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것처럼 육체에 대한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욕망임과 동시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자연을 느끼는 것만큼 정신적인 충족감을 주는 행위이다.
그러나, 섹스를 논하려면 욕망의 해소라든가 충동의 해결을 위한 관점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애정, 사랑, 친밀감, friend with benefit, 다 좋다. 그러나 유전자 전달이 목적이 아닌 이상 섹스의 목적은 사랑의 완성에 있고, 성적 욕망 역시 대상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토대로 하여, 성행위를 통해 이를 더 강화시킨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성을 필요 이상으로 충동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고루한가. 역사 인류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종교가 섹스를 억압해 온 건 사실이지만, 현대 사회, 특히 최근 10여년 간, 성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며, 누구나 자유롭게 성충동을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몽을 넘어 과도하게 주입되어, 지켜져야 더 가치있을지도 모를 내밀함마저 무방비하게 준비 없이 노출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섹스란 게 두 남녀 혹은 동성 커플의 친밀감과 애정의 완성과 확인을 위해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묶는 의미있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인스턴트적으로 만나서 쉽게 섹스하는 일이 합법적인 것은 물론이고,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 시대에, 종교가 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당장 컴퓨터를 켜고 바깥 세계로 연결된 인터넷에 접속해보자. 온국민의 시작화면인 네이버 홈의 뉴스 기사 하나만 클릭해도, 상품화된 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최고의 부스를 자랑한다던 스스로 지성인임을 자처하던, 보수를 대변하는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서는 주요 부분을 클로즈업 하고 유혹하는 반나의 성인들이 사이즈 확대며 성만족을 위한 각종 상품들과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한 광고를 백두대낮 어린 아기들도 클릭할 수 있는 환한 컴퓨터 모니터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광고하는 시대에, 종교가 성을 억압한다니. 조금 시대 착오적인 주장이 아닌가.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들은 개인의 은밀한 성생활에 대한 자료를 심리치료사로서의 임상 데이터에 기반으로 한다.즉, 결혼생활 혹은 다른 정신적 문제를 가진 환자와의 심리적 임상치료 과정에서 나온 데이터와 무신론적 종교 인류학을 결합해서 지나치게 해석한다.
물론, 종교를 지난 몇천년간 인류 문화를 지배해온 역사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청소년기의 자위나 혼인 전 성교, 구강섹스, 동성연애 등에 대한 죄책감이 성적 무지로부터 비롯된 종교적 억압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종교 내에서는 신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만일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삶을 지배하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성교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은밀한 행동을 할 때, 설령 그게 나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더라도 예를 들어 똥이나 오줌을 누거나 밥을 버리거나 몹시도 게을러지거나 할 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신에게 수치심 혹은 난감함을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설령 종교가 그런 행위들을 억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굳이 성적 억압을 종교적 억압이라는 틀에 맞추어 무신론을 주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성충동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남녀의 시각이 다르고 나이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기 때문에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게 맞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의 확신을 얻었을 때 서로의 몸을 허락하는 종교적 원칙이 그리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나도 교회를 한두 해 다녀 봤지만, 어느 교회에서건 목사가 강조하는 것 중 우리의 세속적 생활을 통제하는 범위 내의 것은 십일조를 내야 한다, 건축 헌금을 내야 된다는 종류의 것 뿐이지, 성적인 행위까지 통제의 범위 내에 두는 것은 별로 보지를 못했다. 아마도 미국의 청교도적인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아직까지도 종교편향의 사람들에게는 섹스에 대한 무의식적 죄책감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저자의 주장이 조금은 시대 착오적인 것이라는 나의 견해를 제외하고는 이 책은 전체적으로 종교에 대한 납득할 만한 사실을 근거로 실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다. 그 예로, 성직자의 성추문이 교회 조직 내에서 어떻게 보호되고 성 학대 사건을 은폐하는 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의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교사 등 남을 돕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고객과 성관계를 맺으면, 즉시 해고되고 심지어 형사법으로 고소, 처벌될 수도 있지만 수백년간 철통같은 성직자 보호 조직 속의 카톨릭 성직자들이나 조직 내 자금 조달 능력과 리더쉽으로 영향력이 큰 목사의 경우, 오히려 종교 조직 내에서 보호 받으며 더 나아가,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교회의 잇권을 가진 이사회에 의해 다른 명목으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섹스와 자위 행위에 대해 종교에서 전하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섹스를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은 있지만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섹스를 하는 도중 느끼는 죄책감보다는 비 종교적 이유, 즉 이성 친구가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맘대로 섹스를 하지 못해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더 크지 않을까.
이 책은 무신론적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기 위해 종교 자체의 부정적 측면들을 실날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종교는 신자들을 통제하고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교회를 떠남으로써 생기는 사회적 고립을 복종의 메시지와 함께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는다. 실제로 사이비 종교나 이단으로 불리는 종교들 내의 유대 관계는 가족 이상의, 아니 가족을 파괴할 만큼의 결속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단이 아니어도 기독교는 특히 여러가지 방식으로 교회 내에서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도록 장려한다. 그들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없다. 종교 속에 감금되어서가 아니라, 고립이 두려워서이다. 종교라는 이름의 끈끈한 유대관계와 결집이 달콤해서 중독되는 것이다. 종교가 주는 아늑한 사회성, 그들이 이미 정을 붙인 그만의 세상에서 소외되는 고립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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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종교는 혁명적인 생각을 내놨다. 종교가 문화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 보편적인 종교는 마치 침략자처럼 행세하며 부족 종교를 마구 없애버리고 부족 문화를 감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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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종교와 질병은 항상 협조관계였다. 종교는 기도를 통해 질병의 치유를 약속하고 혹시 질병에게 패하는 경우에도 대신 천국을 약속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문화인류학 관점에서나 혹은 생물적 존재로서의 관점에서나 일부일처제가 반드시 궁극적 합의에 도달한 인류 최후의 문화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유인원과 모든 동물에게서 동성애, 난교, 자위 등의 성적 다양성이 발견되었고, 수렵 채집 문화의 부족에게서는 결혼이나 나이의 제한이라는 제도에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문화가 관찰되었다. 남녀가 비교적 평등했던 수렵 채집 문화를 깨고 나타난 농경문화의 종교는 양적 팽창을 통해 인류 전체의 성문화와 이성 간의 관계를 지배하였다. 농경 사회에서 시작된 보편적 종교는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 성적 억압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였고, 불교, 기독교, 카톨릭, 이슬람을 막론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남성의 지배 체제 밑으로 종속시켰다는 점을 저자는 새삼 주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