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모와 다른 아이들 1 - ![]()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열린책들 |
인간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반전도 스토리도 사연도 없는 균일한 인류는 얼마나 지루한 곳일까. 진화는 돌연변이로부터 왔다. 태초 균질한 상태에서 발생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작은 실수, 작은 우연, 작은 차이였다. 완벽하게 아무 변화도 없을 그 무로부터 유가 발생했던 순간, 그리고 적응을 위해 작은 차이들이 이루어낸 기적들을 생각한다면, 쓸모없어 보이는 차이라 하더라도 평균의 인간이 보통의 삶을 살아가기에 불편한 차이를 가지고 있더라도 태초 생명의 탄생과 진화와 같은 커다란 차원에서 볼 때, 그 차이는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성임을 인정해야 한다.
배우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면서 우리는 대개 자신과 비슷한 2세를 기대한다. 사실 비슷한 것으로는 모자라고, 자신보다 더 나은 2세를 원한다. 나의 장점과 배우자의 장점, 그리고 양가의 혈육에서 가장 우월한 유전자만을 물려받기를 소망한다. 학교와 학원을 중심으로 치마바람과 바지바람같은 이해집단을 형성하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부모들의 심리 밑바닥에는 환경적 제약과 몰이해와 무지 등으로 인해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을 내 아이를 통해 실현하고자 부모들의 원초적 욕망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은 그 누구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기대하지, 평범에서 벗어난 일반인과 다른 적어도 부모와 매우 다른 아이를 원하지도 기대하지는 않는다.
장애, 혹은 다른 정체성으로 불리우는 차이를 가진 아이를 내 아이로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이가 부모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출산과 동시에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몇주, 몇달 혹은 수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부터 부모의 삶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남은 인생을 완전한 절망과 약간의 희망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온 몸과 온 마음으로도 모자라 모든 재산과 직업마저도 죽을 때까지 남은 한 줌의 숨마저 아이에게 헌신하고 걱정하며 가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867페이지의 두꺼운 책, 그것도 모자라 두 권 한 세트로 구성된 이 책의 저자 앤드루 솔로몬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전작 <한낮의 우울>은 퓰리처상 파이널에 오른 우울증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담은 책으로 2001년 출판되어 우울증 학회 및 영국과 미국의 각종 상을 휩쓸었고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책 특히 1권에서 다루는 장애인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스스로 동성애자로,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을 장애 혹은 질병으로 인식하는 부모와 사회의 편견에 맞서야 하는 위치에서 '치료'라 불리우는 이상한 행위를 강요받기도 했다.
두 권 세트로 되어 있는 이 책의 1부는 서문에 해당하는 아들, 청각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장애의 총 7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 아버지의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만 읽었다. 솔로몬은 이 책을 쓰기 위해 10여년에 걸쳐 300여 가정을 인터뷰해왔으며 인터뷰 기록만도 거의 4만 페이지에 육박한다. 책의 내용은 해당 주제에 대한 학술적, 통계 자료를 포함하지만 주로 관찰과 인터뷰 기록과 조사 내용, 심리적, 의학적, 사회적, 역사적 문헌에서 가져온 인용 및 요약문 등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며, 때로 개인의 의견과 생각이 뚜렷이 전해지지만 내가 느끼기에 특히 감상적인 견해를 극도로 경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부모들을 만난다. 주로 미국과 영국의 부모들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비용문제와 사회적 완충 시스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렸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라고 해서,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라고 해서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장애인에 대해 시스템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로지 부모만이 그들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사회적 합의는 있는 듯하고, 또한 적어도 출산시, 출산 후의 부적절한 조치에 의해 장애가 초래된 경우에는 그 흔한 소송을 통해 아이의 평생이 보장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 중복 장애가 있는 경우나 자폐아의 경우 80% 이상이 아이가 성인이 된 후 40 이후가 되어 부모가 죽기 직전까지 그 자식을 보살핀다는 사실을 보면,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장애를 그 어떤 사회 시스템에 기대할 수 없다고 보인다.
장애? 정체성
사실 애초부터 보이지 않는 사람, 애초부터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문제로 인해 겪는 고통이란 건 그들과 다른 일반인들이 만들어놓은 덫에 있을 뿐 본인 스스로 불편하지 않다. 올리버 색슨의 <화성의 인류학자>에 보면 50년간 시각장애자로 살던 사람이 의학의 힘으로 다시 시력을 찾았을 때의 혼란을 잘 보여준다. 그는 노력했으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반 타의반 세상을 눈으로는 다시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
켄트는 자신의 시각 장애를 자신의 갈색 머리 만큼이나 가치 중립적인 특징으로 생각한다(p67) |
2부에서 다루는 청각장애인들은 이 정체성 이론이 특히 강한데, 그들의 언어인 수화가 그들 상호간의 소통에는 너무나 완벽할 뿐만 아니라, 단어의 순차적 배열로 이루어진 음성 언어에 비해 수화는 몸짓의 사소한 차이, 크기가 나타내는 의미의 변화와 동시다발적인 동작으로 다채롭고 풍부한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진다. 따라서 만일 청각 장애인들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하거나 불편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에게 의사전달을 해야 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볼 때만이 그들이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인인가 정체성인가의 논란은 소인(난쟁이), 자폐증, 다운증후군에게까지 확대되고, 그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커뮤니티가 소개된다.
농문화는 하나의 어엿한 문화이자 삶이며, 언어이면서 미학적 특징이고, 신체적인 특징이자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지식이다... 이들에게 언어란 단지 혀와 후두의 제한된 구조가 아니라 주요한 여러 근육 조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인 까닭이다. (p119) |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에서 다른 자식을 둔 부모라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소수자로스의 권리 보호를 위해 단체 결성의 필요성이다. 그것이 정체성이든 장애든 상관없다. 어쨌든 다르지 않은가, 어쨌든 소수이지 않은가. 소수에게도 소수로서의 권리가 있다. 소수가 다수에 의해 받는 차별을 이기적인 다수가 알 턱이 있는가. 알려야 한다. 다수가 차지하는 소수의 몫의 일부를 되찾으려면, 그리고 소수가 다수가 살아가기 위한 방법만으로 가득찬 지식의 세계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같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경험을 교환하고 동족을 형성해야 한다. 이곳에서 인터뷰한 미국 및 영국의 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을 스스로 돌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동종의 커뮤니티를 통해 많은 교류를 했다. 특히 아이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면서 스스로의 직업이 바뀌거나 자긱에게 해당한 장애에 대한 의료나 교육에 지대한 공을 세워 학계나 의료게에서까지 알아주게 되는 케이스도 보았다. 청각장애인의 부모는 수화를 배워 농아학교의 교사가 되고 수화 통역을 하였으며, 자폐증 부모는 아이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여 수많은 교재와 방법론을 동종 커뮤니티에 퍼뜨리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중도 장애를 가진 부모들의 실태가 이렇게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연구되었는지 의문이지만, 아이를 감추고 가두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필요한 경우 힘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어디든 무엇을 하든 비슷한 길을 조금 먼저 여행한 다른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길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한 번 빠진 늪에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와 수용 사이
저자가 인터뷰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경험을 어떤 다른 삶과도 절대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차피 삶이란 바꿀 수 없으므로, 장애인을 키우는 경험마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영미인들의 사고 방식에 찬사를 보낸다. 힘든 경험이지만 아이와의 끈끈한 유대관계에서 삶의 목표를 재정립하고 도전과 시련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는 뜻일 것이다. 때론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포기하는 부모도 있었다. 영국의 중도 복합 장애인의 부모로 아이는 의식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두뇌 피질이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법적으로 아이를 포기하는 게 가능한 나라였다. 그냥 그렇게 병원에 아이를 두고 걸어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아이는 후에 위탁부모에 맡겨지는데, 그 위탁부모와 친부모는 서로 왕래하며 지내게 된다. 친모는 용감하게도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글로 썼으며 아이를 버렸다는 비난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자폐증이나 정신분열증의 경우 아이를 살해하는 경우도 다수 소개되어있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아이를 사랑하고 참아내는 충동과 아이를 밀어내는 충동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솔로몬과의 인터뷰에서 대다수의 부모는 만일 다른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면, 그러니까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되더라도 절대 아이를 포기하거나 다른 정상인 아이와 바꾸지 않겠다고,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말한다.
두꺼운 책이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설렁설렁 읽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저자가 다방면에서 활동하기기 전에 소설가이기도 한 까닭에 문장이 명료하고, 깨끗하며, 자칫 감상적이거나 감정적일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매우 객관적이면서도 뚜렷한 자기 생각을 훌륭한 문체 안에 담고 있기 때문에, 문장 하나 하나 놓칠 것이 없었다. 틀림과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라고들 외치고 있지만, 그 차이의 이면에는 이런 두꺼운 책 두 권에도 다 담을 수 없어서 웹 버전의 참고 인용 내용을 추가해야 하는 수많은 디테일이 있다. 인간의 다양성, 인간의 본성, 인간의 양면성 그런 모든 것들을 다채로운 시각과 입장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너무나도 훌륭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