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법의 해변 - ![]() 크로켓 존슨 글.그림, 김미나 옮김/자음과모음 |
때로 책 속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들면 머리 속에서는 그 곳 세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희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짜릿한 모헙과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배경 속에서 가슴 설렌 사랑을 하고, 온갖 고생을 하지만 결국은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되고 해피 앤딩으로 자주 끝난다. 한 사람, 혹은 한 시대 어떤 사건들의 전체 중 가장 핵심적인 것들만 모아 잘 짜맞춘 이야기들을 책을 읽을 때는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무료하고 따분한 책 바깥의 세상, 글자 밖의 현실에서는 맞볼 수 없는 경험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진짜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어". 앤과 벤은 오두막에서 책을 읽다가 고둥을 찾으러 모래로 가득한 해변으로 나온다. 앤은 다리가 아프다면 오두막에 그냥 있는게 나을 뻔 했다며 툴툴거리지만 벤은 읽기만 하는 것보다는 직접 이야기를 만드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이야기 속에서 진짜로 벌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벤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란 단어들을 늘어놓은 것일 뿐이야. 단어는 글자에 불과해. 글자들은 그저 기호의 일종이고."
그 기호가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은 참으로 어마어마하다. 이야기들은 때로 역사를 바꾸고 인생을 바꾼다. 배가 고픈 아이들은 모래 위에 글씨를 쓴다. 잼이라고 쓰자 잼이 나타나고, 빵이라고 쓰자 빵이 나타나고, 우유라고 쓰자 우유가 나타나고 왕이라고 쓰자 왕이 나타나고, 나무, 숲, 들, 숲, 성을 차례대로 쓰자 모든 것이 나타난다. 글자와 상징이 만드는 것들은 그렇게 일시적이지만, 분명 실제처럼 존재하는 것이라는 상징일까.
상상력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표지가 무척 책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는데, 자세한 내막을 읽어보니, 사실 딱히 어른들을 콕 짚어서 쓴 글이 아니라서 무려 수십군데의 출판사에서 출판 거절을 당했고,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고 전한다. 크로켓 존슨이 이 책의 출간을 원했을 때 이미 매우 인기가 높은 삽화가이자 동화가였던 것 같은데, 책의 출간이 쉽지 않았던 건 어린이에게는 너무 내용이 어렵고 상징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어렵게 출판 계약이 성사된 1965년 판 모래위의성은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는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고, 이제까지 원작자의 그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패션잡지에 작품을 싣던 삽화가 베티 프레이저가 정교하게 삽화를 따로 그려넣었던 책으로 유통되어 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작가탄생 백주년 즈음해서 작가가 직접 쓴 삽화를 엮은 책으로 나온 것이다.
삽화가 제외된 이유는 간결함 때문일 것 같은데, 아이들을 겨냥했다면 프레이저가 그린 그림으로 나온 책이 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이 색상이 없어, 단출하고 스케치만 있는 느낌이 들을 수도 있다. 물론 스케치만으로도 충분히 감성적이고 명료함을 느낄 수 있지만, 작가의 그림에 약간의 채색을 해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다.
짧은 책이지만, 표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상상력을 잃어버린" 성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이다. 글자가 현실이되고 다시 그 글자들은 바닷물에 씻겨 없어지는 것은 우리가 책을 통해 경험하는 짧고 흥미로운 세계를 말하는 것 같다. 표지도 예쁘고 가지고 있기만 해도 보물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