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빨간구두당 - ![]() 구병모 지음/창비 |
내게 구병모는, 국내 단편들은 어딘지 답답하고 가독성도 떨어지고, 어렵다는 편견을 깬 작가다. 가독성과 문학적 깊이가 반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읽혀도 마음을 오랫동안 흔들어놓는 작품이 있고, 여러 번 읽어서 어렵게 해독한 문장도 쉬이 휘발해 버리는 서사가 있다. 띄엄띄엄 읽어서 한국 문학의 흐름을 제대로 잘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 읽은 몇몇 수상집 단편과 비교해보면 일단 과도한 자의식이나 지식의 나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고, 기묘한 세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세계를 다루는데, 그 세계에 현실보다도 더욱 불편한 리얼리티가 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풍자로 읽어내고 말 수는 없는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과 풍부한 서사를 제공한다.
어릴 때부터 주워듣고 읽어온 서양의 동화들은 활자화되기 이전부터 이동네 저동네로 구전되어졌다. 시대와 시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실어나르는 동안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고, 변형되고, 일부는 잘려나가면서 생명력을 가졌다. 우리가 동화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은 활자화될 때의 장소와 시간에서 스템프처럼 찍어낸, 죽은 이야기들이다. 활자의 탄생이 인류에게 무한한 지식의 확장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제시했지만, 이야기의 생명력으로 따지자면 활자는 이야기를 획일적으로 동결시켜 죽였다. 빨간구두 이야기가 계속 구전되어 산넘고 물건너 너른 사막과 시베리아를 지나고 바다건너 우리나라까지 구전되어왔다면 그것은 어떤 이야기가 되어 우리의 토속 민담이 되었을까. 호랑이가 물고간다는 전설은 있지만 빨간 구두 신겨진 발이 춤추는 것을 멈추기 위해 발을 잘라낸다는 잔인한 이야기는 무언가 다른, 우리 선조들이 이야기로서 받아들일만한 다른 변주로 바뀌었을 것이다. 신데렐라형의 이야기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은 콩쥐팥쥐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민담들은 국경과 대륙을 넘나들며 서로 영향받았을 거 같다.
구병모의 사인본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닫힌 이야기에 갇히지 않고, 구병모", 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우리가 언젠가는 듣거나 읽어서 알고 있던 많은 종류의 동화들은 대개 해피하게 끝을 맺는다. 위기에 빠진 공주는 왕자와 만나 결혼하고, 못된 계모들은 천벌을 받고, 저주받은 마법은 풀린다. 불행하게 끝나는 경우도 많다. 왕자를 사랑한 인어공주는 한마디 항변도 못한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성냥을 팔던 소녀는 추운 겨울에 남의 집 창문 앞에서 시린손을 성냥불로 녹이면서 죽어간다. 이렇게 닫겨진 이야기의 문을 다시 열고, 활자 이래로 박제되어 있던 이야기의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것이 이 책이다.
빨간구두당은 색을 잃은 세계에 어느날 찾아온 빨간색에 관한 스토리이다. 색을 잃은 세계에 색깔은 전설이다. 까마득한 윗 대의 선조, 증조부의 증조부의 증조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색이라는 개념에 대해 현재 세대는 완벽하게 무지하다. 색이 없이 흑백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판단 능력은 그들이 식별해낼 수 있는 흑백의 색만큼이나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한 무지라는 질서 속에 찾아온 빨간구두를 신은 춤추는 처녀는 마을을 찢어놓는다. 빨간 구두를 신은 처녀는 춤을 멈추지 못하고, 빨간 구두의 빨간 색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빨간 구두가 보이면서 빨간 색을 가진 물건을 식별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렇게 마을은 빨간색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뉜다. 빨간구두가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빨간구두당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이고, 첫번째 이야기의 제목이다.
여기에 포함된 단편은 빨간구두당을 포함해서, 개구리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기슭과 노수부, 카이사르의 순무, 헤르메스의 붕대,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 거위지기가 본것, 화감소녀전의 총 9개다. 빨간구두당은 안델센의 빨간구두의 변주이고, 개구리왕 또는 강철의 하인리히는 그림형제의 동명 동화의 변주인 것 같다. 새뮤얼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 그림형제의 영리한 엘제, 거위지기 아가씨, 성냥팔이 소녀 등이 그림형제의 동일 제목의 민담 동화에서 따왔으나, 내용은 수많은 설화와 전래동화들을 다채롭게 변형하고 윤색하고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전혀 새로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최근 민음사에서 주최한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구병모의 전작 소설집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단편 소설 한편 한편 내에 넘치도록 많은 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이런 저런 동화와 전설에서 가져왔지만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주요 서사의 뼈대와 혈관이 되어 이야기를 완성한다. 동화속의 모티브들은 처연하며 아름답고 스토리의 힘은 강렬하지만, 그것의 은밀한 내면은 현재 우리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시끄럽고 화려하고 잔인한 환상의 세계 속에서 현질을 소환하는 것. 그 조용한 성찰. 그것이 구병모 소설의 특징이자 책을 쥐고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