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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소설

[르네 바르자벨] 대재난

대재난 - 10점
르네 바르자벨 지음, 박나리 옮김/은행나무

SF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읽은 거라고는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소설들을 제외하면 몇 개 한 손으로 꼽을만큼도 안되지만, 그 매력은 거시적인 시각으로 현재의 인류를 통찰하는 데 있다는 점을 느낀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 일상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들의 의존성을 새삼 깨닫게 하고, 사회적 관습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볼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지난 세기에 쓰여진 현재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래소설이라면 독자는 소설속에서 상상한 미래의 기술과 이미 구현되었거나 쓸모없는 기술, 그리고 앞으로 갖게 될 기술들 사이에서 그 소설의 예언적 혹은 예측적 능력을 후세라는 우월한 위치에서 평가하는 즐거움도 얻게 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전기의 부재는 상상할 수도 없다. 어제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휘발유 차 대신 한 번 충전으로 시속 180Km 이상을  300km 이상 달리는 전지와 전기 자동차 기술이 GM에서 이미 20년이나 앞선 199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그 기술로 인해 정유회사의 계략으로 모든 기술이 폐기되었다는 내용인이다.  이런 음모설에 대한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최초의 자동차 역시 전기 자동차가 가솔린 자동차보다 먼저 나왔고 19세기 말 100km/h를 달리는 것도 가능해서 반짝 유행한 적도 있지만, 값싼 화석연료와 대형 정유회사들의 등장으로 쇠퇴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최근 테슬러의 활약을 보면 머지 않아 전기 자동차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바르자벨은 궁극적으로 오늘날 정유회사들의 막강한 파워를 원자력 회사들에게 부여했다. 해수를 발효하고 증류해서 얻은 정제원료 0.5리터로 1천킬로미터 이상을 주파 가능한데, 원자력 회사들이 은밀하게 반대를 했음에도 그 수가 계속 증가했는데, 이 정제원료의 단점은 값싼 대신 대량의 산소를 많이 필요로 했고 그래서 도시는 산소부족으로 시달려야 했다는 것이다. 


대재난은 전기가 어떤 이유로 동작하지 않으면서 시작된다. 르네 바르자벨은 60여년 전 미래 2058년에 기술과학이  도달할 동력의 원천으로 해처럼 달처럼, 늘 그자리에 있게 될 어떤 힘으로 전기를 상상했고, 그것의 갑작스런 소멸이 몰고올 미래를 그렸다. 늘어난 인구는 도시 전체를 거대한 100층 이상의 마천루로 이루어진 공중 도시로 변모시키고, 300km 속도의 열차는 지나간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낡은 교통수단이며, 사람들은 도시와 도시를 거미줄처럼 연결한 거대한 모노레일로 시속 2~3천km의 속도로 '한가로이' 여행하는 것을 즐겼으나 도시의 대기위로는 최첨단 항공기들이 새처럼 거미처럼 내려앉고 올라가곤 한다.


오늘날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은 서울과 같은 도시의 전력이 하루 이틀이라도 완전히 끊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건 엊그제 집에서 경험한 일인데, 당연히 전기가 정지되면 모든 것이 정지된다. 엘리베이터와 냉장고는 물론 전기 없이는 가스 점화도 불가능하다. 한두시간이 아닌 하루 이틀이 되면 냉장고의 모든 음식들은 썩을 것이며, 고층 아파트에 사는 우리들은 드나들기도 어려워지고, 먹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점화가 안된다는 건 겨울에 난방이 끊어진다는 말이니 얼어죽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세계적인 전력 중단이 일어나기 때문에, 상수도 설비도 모두 중단되고 물마저도 수돗물마저 얻을 수 없다. 이 소설에서 2058년 세계는 조지오웰의 <1984>처럼 대륙 단위로 지배하는 군주가 있는데, 전체주의의 군주 대신 기술문명과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가 예언한 것들 중 현재 이미 실현되었거나 어느 정도 실현된 것들은, 초고속 열차, 화상 전화, 유전자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생물종의 탄생, 공장화된 식용작물 재배 시스템, GM 기술이 실현한 빠르게 성장하는 농작물, 핵에너지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 등등이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의외로 신용카드, 오늘날과 같은 SNS와 휴대폰 등이고, 가장 바보스러운 아이디어는 수도꼭지에서 우유가 나오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저자의 상상은 꽤나 치밀하고 구체적이어서, 그럴듯하다. 특히 고위층의 인간이 점차로 제 손으로 뭔가를 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설정은 정말 그럴듯하다. 


제롬은 단 한번도 무언가를 제 손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대기하며 요구에 부응하는 부하 직원들과 완벽한 장비들이 한 트럭씩 있었다. 부하들이나 장비들이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자신의 몸 장기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주변에서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1천개에 달하는 그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그 자신이 모든 일을 손수하도록 그를 홀로 남겨두었다. (P146)


프랑스가 배경이지만, 대재난은 전세계를 포괄한다. 처음으로 전세계를 강타한 약 10분 동안의 종류를 막론한 모든 전력의 전압의 급격한 하락은 태양의 흑점, 급격한 지구 기온 상승, 폭염 등을 원인으로 크게 대수롭지 않게 지목되었으나, 이것은 마침내 데뷰를 앞둔 블랑슈의 데뷰 공연이 벌어지던 날, 100층의 방송국에서 시작된다. 때마침, 아프리카로 강제이주당한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 황제는 전세계를 향해 천발의 항공 어뢰와 10만대의 전투기 공격으로 인류 절멸을 꾀하고 있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공중에서 비행기들이 폭파되어 도시의 곳곳으로 내려앉았으며, 전력을 잃은 시민들은 공항상태에 빠져 높은 계단을 빠져나오다가 계단에서 압사당하고, 상점들은 약탈당한다. 


그나마 남아있던 얼마 되지 않은 남쪽 시골에서 전통적 방식의 육체 노동으로 삶을 살아오던 프랑수아는 블랑슈를 구해내고 팀을 조직해, 아비규환의 재앙의 도시를 탈출하는 과정이 엄청난 스케일과 세심한 묘사로 이루어져있다. 만일 그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프랑수아는 고향에서 사랑하던 블랑슈가 스타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블랑슈를 돈으로 매수한 방송사 예술국장 제롬의 계략으로 학교 입학도 거절당한 채 권력의 힘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완전한 루저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팔자였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재난을 헤처 나가는 프랑수아는 때로 잔인하다. 의인처럼 등장한 그의 잔인함이 처음으로 묘사된 곳은, 정신을 잃은 블랑슈를 지키기 위해 말을 얻는 과정에서 말주인인 정원사를 죽이는 일이다. 도시의 마천루들 사이로 거대한 정원을 지키는 수석정원사가 아이들을 태워 산책시키는 마차를 기억해내고는 자신의 짐을 싸서 피난을 하려하는 정원사에게 자신들을 조금만 태워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가차없이 그를 죽이고는 마차를 탈취한 것이다. 


약탈이 일상이 된 도시에서, 프랑수아는 혼자서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팀을 꾸린다. 자연적 재앙이 일어나면, 자연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인간들이 더 큰 적이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절박한 현실, 팀원들조차 실수를 하면 죽여버리는 카리스마를 통해 프랑수아는 원시부족의 리더로서의 능력을 키워간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은 화재를 몰고 왔고, 도시는 구석구석 화재로 뒤뎦혔으며, 콜레라가 창궐한 도시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괴물이 되어갔고, 그 괴물들은 어디에서건 나타난다. 물과 먹을 것을 얻기 위한 치열한 싸움, 걷고 걷고 또 걸어 찾아낸 곳에서, 새로 시작한 원시적 생활 그리고, 거기에 도사리는 또다른 반전과 그 반전.


재난이 인류의 기술을 모두 끝냈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게 된다면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인간이 스스로의 몸을 움직여서 만들어내던 모든 에너지를 기술적 동력으로 대체하게 되었을 때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그 인위적인 것들과 대척점에 서게 된 프랑수아의 선택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미 기계와 도구의 사용이 DNA처럼 몸에 감각에 본능처럼 간직된 인간은 모든 책을 태워버리고 모든 과학 기술적 진보를 금지시켜도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