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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견딜 수 없으면 그만둬라. 죽는 것 보다는 낫다.

[도서]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키타가와 에미 저/추지나 역
놀 | 201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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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달려오는 철로에 몸을 던지고자 눈을 감고 의식을 놓고 있는 아오야마와 같은 순간과 비슷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 직장 초년생들이 있을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쓰다가 겨우겨우 바늘구멍 같은 정규직 직원이 되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경쟁 현실은 자주 가혹하다. 널리고 널린 실업자들을 아무때나 갖다 쓰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진 사측에게 초년생들은 때로 아무렇게나 불쏘시개처럼 쓰다 버릴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떻게 적응을 하여 실적이라도 높이려니, 이젠 그를 음해하고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는 선배가 나타난다. 어렵게 따낸 주문이 잘못되어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힐뻔한 아오야마는 철로에서 자신을 구해준 동창생에게서도 더 이상 아무 위로를 얻게 되지 못하고, 옥상의 철문이 열리는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다. 


죽음이 삶보다 더 아늑해보이는 현실. 그것이 다른 이의 죽음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삶을 하루 하루 채워가기 위해 일하는 직장에서 똑같은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사회라는 그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면,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처지에 내몰려, 앞으로도 나가지도 뒤로 빼지도 못한채 낙오되었다는 생각만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그렇게 힘겹게 채우고 있을 오늘날의 청년들을 생각하니 늙으신 부모님들 이상 마음이 아파온다. 세상은 속상한일 천지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극심한 청년 취업난을 이용하여, 인격을 침해하고 모독하는 사주와 나이만 먹은 선배들이 있다. 어렵게 중소 기업에 입사하여 영업사원을 뛰고 있으나 폭력적 언어와 때로 물리적 폭력에 가까운 상사의 대우를 참고 견디는 일이 힘겨워 매일 힘겹게 지하철에 몸을 싣는 대신 그곳에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인류 역사 이래로, 가장 찬란한 나이의 청춘들이 가장 많은 자살을 꿈꾸고, 또 실제로 자살로 이어지는 비율이 오늘날만큼 압도적으로 많아진 적이 없었다. 전쟁에서 죽는 청년과 자살로 죽는 비율을 비교해볼 때, 인간이 모질게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그 모든 일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신앙과도 같은 개인주의 사상에서 근거한다. 

 

소설은 높은 청년 실업률에 기생하는 비윤리적 회사와 그 속에서 더욱 이기적인 부품으로 전락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괴물같은 사회적 벽 앞에서 자신을 잃고 매몰되어 가는 길잃은 직장인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나를 되찾을 용기를 준다. 이직률이 높은 회사는 관두면 되는 거다. 다행히도 아오야마는 임상심리사라는 새로운 분야의 인턴으로 일을 하는 것으로 훈훈하게 끝난다. 그것이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일까. 현실에서 몇 년씩 일자리를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구한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 대개는 죽음 만큼이나 힘겨울 것이다. 아오야마의 부모가 따스하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의 평균적인 부모들이라면 어떨까. 돈 벌기가 어디 쉬운 줄 아냐, 몇 달도 견디지 못하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거냐라는 종류의 비난이 머리속을 소란스럽게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만큼 참고, 노력하다가 그만둘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전적으로 다시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만둔다고 누가 대신 밥값을 벌어다줄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알바와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끊임없이 정규직으로의 꿈을 꾸는 대신 다른 대안이 없을까. 찹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