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자밖 여운/교양

두 명의 엄마 , 두 명의 아들, 한 명의 애인

[도서]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저/강수정 역
예담 | 2016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이 책의 첫번째 중편 <그랜드마더스>는 영화로 제작되어 국내에는 2013년 <투마더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을 <다섯째 아이>로 접했던 바, 기대도 컸지만 무엇보다 19금 선정성을 기대하게 하는 자극적인 소재를 어떻게 이 노벨상 수상자가 문학성 높은 작품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영화에서는 나오미 와츠의 전라가 공개되어 화재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소설은 두 명의 엄마와 두 명의 아들이 서로의 가족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거의 한 울타리에서 어떻게 그들만의 낙원을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 

학창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언제나 단짝 친구가 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반이 되면 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서로를 찾아 다니느라 교실 문지방이 닳아지던 일, 넌 좀 너네 반에 가서 떠들으라며 자기네 반 애들만으로도 충분히 시끄럽다고 하던 친구반 선생님의 목소리도 기억난다. 둘이 함께라면 늘 잘 통하고 뭐든 얘기하게 되고 또 즐거운 단짝 친구와 만일 평생 가까이에서 살게 된다면 정말 근사한 생이 될 거라고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함께 가까이 살기를 바라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그러나 여기 쌍둥이같이 친했던 릴과 로즈는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고도 계속해서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인 채로 바닷가 마을 둘만의 낙원 같은 세상을 꾸릴 수 있었다.

햇빛 부서지고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그들의 낙원에서 각자의 남편들은 들러리에 불과했고 아이들은 공동의 소유인 것처럼 양쪽 부모 모두에게 공동 양육된다. 엄마들처럼 아이들도 똑같이 베스트프렌즈가 되고 매일 함께 반짝이는 모래를 밟고 바다로 뛰어 들어가 수영을 하고 서핑을 한다. 부모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들 역시 빛나는 금발에 아름다운 소년으로 성장한다. 자신들이 두 단짝 친구 여성의 삶에 아주 보잘 것 없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로즈의 남편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다가 떠나고, 릴의 남편은 사고로 죽는다. 그 두세트의 베프들 사이에서 아무 존재도 되지 못했던 남자들이 선물처럼 아름다운 아들들만을 남겨놓고, 한 명은 자신들이 주인공인 세상으로 복귀하고, 공교롭게도 자신의 위치보다는 바쁜 세상사가 더 중요했던 또다른 한명조차 세상을 떠난 것은 그곳 터전에 고집스레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결속시킨다. 그들은 세상과 구분되는 우월함을 바탕으로 자신들 고유의 질서를 만들고 그 아늑함 속에 자신들을 편히 눕힌다. 아이들이 수영하는 동안 비키니로 가린 여전히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을 햇빛에 그을리며 날로 장성해가는 아이들의 몸에 찬탄한다.

영화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유튜브에서 찔끔찔끔 올라온 영상들을 조합해서 추측해본 결과 친구의 아들이 연인이 되는 계기는 소설과는 약간 다르게 진행되는 듯하다. 건조한 문체는 많은 걸 알려주지는 않지만 대신 많은 걸 상상하게 한다. 엄마와 아들을 공유하는 방식의 삶에 길들여진 이들은 잠자리 구분마저 없다. 서로가 함께 이 집 저 집 가리지 않고 자고 함께 또는 따로 잔다. 이 엄마, 저 엄마 침실을 아무렇게나 들락거리며 뒹구는 일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 힘겨워하고 있던 이안을 평소처럼 안아주고 키스해주었는데 그 아들에게 건네던 위로의 포옹이 연인 사이의 뜨거운 포옹으로 바뀐 것이다. 아들들의 탄탄한 몸에 감탄하던 엄마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육체 역시 이 아들들의 욕망 속에 포착되리라고 예상하지 못다. 남녀의 일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와서 거부할 수 없이 일어나고 돌이킬 수 없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 때 다른 아이 톰은 또 왜 이안이 엄마와 잔 것을 알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릴에게로 갔을까. 이게 웃기는 파트다. 쟤가 내 엄마랑 잤으니까 나도 쟤 엄마랑 자야 돼 혹은 자도 돼. 이 단순히 엄마 세대와 자는 것보다도 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다시 쌍둥이같은 그녀들의 인생과 길게 연결된다. 아름답고 능력있는 두 친구는 잘 어울리는 남자들과 같은 날 결혼을 하고 해변에 나란히 붙어 있는 집을 사서 또 그들과 누가 봐도 한통속의 월등함을 겸비한 아름다운 아들을 낳는데, 그러고는 차례로 이제 아들을 생산하는 자기들의 엑스트라 역할은 끝났다는 듯 각기 다룬 방법으로 떠나준 남편들 대신 각자의 아들들을 연인으로 갖게 된 것이다. 

이들의 정사가 단순히 나이차가 많은 남녀의 사랑이 아닌 그 이상인 이유는 그들에게 서로의 엄마는 자신의 엄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에는 구체적인 정사 장면이라던가 강한 욕망에 대한 심리 묘사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마와 아들이라는 역할 때문에 근친상관과도 같은 퇴폐적 이미지를 뿜어낸다. 서로의 엄마는 애초 서로에게 자신의 또다른 엄마와 그 역할이 같았고, 때문에 한국에서 정한 영화 제목처럼 아이들에게 두 여자들은 두 명의 엄마와도 같은 존재다. 아기 때부터 서로 돌아가며 기저귀를 갈아주던 엄마같은 친구 엄마와 한 아이가 관계를 맺은 것만도 충분히 엽기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 이를 눈치챈 아이가 바로 상대 아이의 엄마에게로 가서 그 행동을 복사라도 하듯 따라하고, 다음날 돌아와 자기 친구와 잔 엄마 앞에서 아침이 되도록 식히지 못한 정사의 열기를 내뿜는 것이다. 먼저 일을 저지른 엄마는 아들의 뺨을 때린다. 찰싹 찰싹 두 번이다. 이것으로 그들 네명의 일탈은 은밀한 비밀에 쌓인 일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구애하는 남자에게 레지비언으로 소문나는 것을 개의치 않는 건, 그러한 은밀한 관계가 레지비언이라는 편견보다 더욱 강도 높은 비난 거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소년들이 맘껏 엄마들을 사랑하며 멋진 청년으로 성장하자, 톰의 결혼을 기회로 로즈는 넷 사이의 애정 관계의 청산을 결단하고 청년들은 새 삶을 시작한다. 이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 힘겨워하고 릴도 운다. 로즈도 따라 울고.. 그들이 평생 함께 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도 낳아야 하지 않은가. 백가지 이유라도 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나. 젊고 탄탄한 몸과 싱그러운 목소리를 경험하고도 친구 엄마가 더 좋다는 건 청소년기 한때 경탄했던 엄마들의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매도할 수만 없다.

또다른 친구 세트 가족이 가세하고 스토리는 거센 물살을 일으킨다. 톰이 먼저 결혼하자 톰의 결혼식에서 알게된 톰의 신부 메리의 여자친구인 한나와 이안이 결혼한 것이다 게다가 쿨한 엄마들은 자기들의 집을 자식들에게 선물로 주고 또다른 바닷가 집을 사서 둘이 아예 살림을 합친다. 친구의 엄마를 먼저 사랑했던 이안이지만 결혼생활은 이안-한나 커플이 톰-로즈 커플보다는 더 행복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안이 순종적인 한나에게서 모성애를 발견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메리는 바로 자신의 시아버지가 집을 떠났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그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과 한나의 위치에 의심하기 시작한다. 너무 친절한 시어머니와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남편, 어떻게 보아도 훌륭한 사람들인데, 그런데도 뭔가가 빠진 것이다. 

자신의 젊음으로는 근접할 수 없는 이 두 모자 가족 세트의 우월함에 대한 악의적인 경쟁심과 적대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덮자 메리의 입장에서 서게 된다. 소설의 처음과 끝을 보면 레싱이 의도적으로 메리를 액자의 틀에 배치시킴으로써 결국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소설 속에서는 주목하지 않았던 메리의 심리를 대변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소외된 개인을 탐구하는 대신, 소외가 어떤 방식으로 감추어지는가를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아이를 낳고 나자 두 며느리들은 의기투합하여 사업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그런 소외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는 마당에 갑자기 일을 한다는 건 행여 집안에서 처진 상태로 낙오되는 것을 우려해 자신의 위치를 경제적 사회적으로라도 다짐으로써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듯 보인다. 

그럼 애는 누가 키우나. 소는 축산업자가 키우지만 애는 할머니가 키운다. 이제 아이들을 매개로 할머니가 되어 그들은 다시 해피했던 한 때에 한 쌍의 생명력 넘치는 꼬마 아가씨들이 가세해,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식사를 한다. 그 달콤한 시간들은 결코 더불어 사는 세상 속에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을까.

* 나머지 소설들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