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할머니가 있었다. 어린 시절, 흐린 기억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채워주고 훈훈한 온기를 불어놓는 것들은 온통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었다. 내 할머니는 엘사의 할머니처럼 상상력으로 가득한 개구장이는 아니었지만, 놀다 지쳐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돌리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소매 안쪽으로 흐르는 콧물과 땀을 닦아주고, 밥먹자 들어가자던 이미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치고 힘들 때마다 나의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그렇다. 한 사람이면 된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딱 한사람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 백 사람이 있는 것과 다르다. 일곱살 짜리에겐 아군이 딱 한 사람이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그 못된 깡패들이 두들겨 패고 애정하는 그리핀도르 목도리를 찢어 화장실에 처박아도, 엄마와 아빠의 이혼 때문에 자신의 거처가 위협을 당해도, 해리포터 시리즈와 스타워즈 같은 고품격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곱살 짜리에겐 슈퍼 히어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p11
책을 너무 읽어 학교에서는 조금 튀고, 아는 것이 너무 많아 어른들에게는 말상대조차 버거운 엘사에게 할머니는 슈퍼히어로다. 그러나 엘사와 할머니는 늘 옥신각신한다. 둘이 옥신각신한 후 최대한 서로가 삐쳐있는 상태는 1분을 넘기지 못한다. 할머니와 아이는 깰락말락 나라에 상상의 힘으로 건설한 환상의 왕국들을 거느린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존재지만, 할머니는 보통 할머니와 다르다. 자유분방한 인생을 살다가 엘사의 할아버지의 딸을 낳은 후, 딸마저도 팽개치고 세상을 구하러 돌아다닌 할머니의 인생은 요즘 흔히 말하는 식으로 따지면 삶 자체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었지만, 그녀의 언행은 자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비난에 개의치는 않는다). 의사였지만 금연을 부당하다고 여기고,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목욕 가운을 열어 놓고 베란다에 서서 이웃에게 페인트 물총을 쏘아대고, 동물원 담을 넘다 걸리자 똥을 던지고, 엘사 때문에 교장선생님에게 불려가면 할머니의 대책없는 행동을 오히려 엘사가 걱정해야 할 처지다.
현대에서 할머니들은 100년전과 200년전의 할머니들에 비해 훨씬 더 빠른 변화 속에서 삶을 적응해야 한다. 선조들의 할머니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세대차에 직면한다. 좋게 말하면 세대차지만, 매일매일 변화하는 속도로 일상의 모든 습관들을 적응시키는 것은 성인들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이제 세계는 개인화 파편화되어 있으므로 같은 세대내에서의 간극 또한 적지 않다. 할머니와 엘사의 차이는 가령 이런 것이다. 엘사는 모르는 어휘가 나오면 무조건 위키피디아에서 찾는다. 할머니는 위키피디아가 백과사전을 컴퓨터에 넣어 놓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반면 엘사는 백과사전이란 위키피디아를 종이에 찍어낸 것이라 이해한다. 이런 차이는 둘 사이 놓인 상상력의 다리로 연결된 교감과 신뢰와 애정이라는 강도 높은 연결 고리로 본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과잉행동에 산만한 골칫거리이고, 급우들에게는 잘난척하고 튀는 아이로 찍혀 괴롭힘의 대상이고, 이혼한 부모와 그 각각의 가족들에게서는 신경쓸 여력이 없는 아이다.
북구 문학 특유의 처연한 유머감각이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뿜어내게 하는 작품이다. 슬픔의 근원은 그 단 하나뿐인 엘사의 아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남겨진 상실감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세상의 모든 일곱살 짜리에게 있어야 할 슈퍼히어로가 떠나야한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퍼즐같은 편지 배달 숙제를 남겼다. 편지를 배달하는 과정에서, 초반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비난과 경멸과 냉담만을 쏘아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과의 관계는 조금씩 회복되고, 엘사는 알지 못했던 그 이웃들의 비밀, 할머니와의 관계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할머니는 의사였음에도 의사에게 기대하는 행동과는 가장 반대되는 언행을 일삼는데, 엘사가 할머니가 숨겨둔 편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이웃들에게 배달하는 과정에서 만나서, 나중에는 엘사의 친구가 되어 가는 이웃들 역시 그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얼굴에 커다란 상처와 머리와 수염으로 뒤덥힌 거대한 괴물은 깔끔 강박증에 걸려 계속 손을 씻고 주위를 경계한다. 매일 건물 사용자에 대해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는 브릿마리는 할머니가 엘사의 엄마를 버려두고 떠난 동안 엄마를 보살핀 이웃이었음이 드러난다.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엄마와 할머니 사이의 두터운 앙금이 해소되고, 다시 반복된 엘사와 엄마와의 관계도 회복된다. 부모의 각자의 가족 사이에서 엘사 자신의 존재가 책에서 배운 것과는 달리,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도, 자신과 반만 피가 섞인 동생 반쪽이가 태어나면 질투 대신, 할머니와 함께 건설한 깰락말락 왕국의 세계에 데려가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