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한 분류 속에 인위적으로 넣는다는 것이 괜한 일 같은 경우가 있다. 독자의 자기계발을 목적으로 진정성 있게 쓰여진 책이라면 인문이나 심리서 혹은 과학서일 수 있으며, 문학 속에는 이 모두를 어우르는 화두를 던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설이라고 나왔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심리서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자기계발을 좋아하는 경우라고 해도 이 책은 골고루 해당시켜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소설로서 혹은 문학으로서 생각한다면 소설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폭풍같은 서사나 혹은 눈씻고 찾아보고픈 문학적 상징성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어쨌든 소설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두 남녀가 한 눈에 반해 미친듯 사랑하고 결혼하여, 시들시들한 사랑을 하면서 성장하는 성인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근거 없는 내 인상에 대체로, 서양 부부들의 특징이 직접적으로 불만을 말하지 않고 그렇다고 쿨하게 날려버리지도 않으면서 속으로 쌓아두면서 겉으로는 달링, 달링 하면서 맘에 없는 말들로 그럭저럭 관계를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막판에 폭발하면서 풍비박살나는 거 같다. 대체로 남녀 노소 결혼 초기부터 벅벅대며 싸우다가 될 성 싶으면 조금씩 서서히 서로의 기대를 포기하는 방법으로 관계가 균형을 찾아가거나 계속 삐걱거리는 채로 살거나 혹은 파괴되는 우리네와는 문화가 다른 것 같다. 아닌가? 나만 그런가? 소설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성격도 환경도 인종도 다른 두 사람의 그 지리한 결혼 생활을 다룬다.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다. 뒤늦게 안경을 벗고 잘못된 선택을 깨닫고 내가 미쳤었나봐라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진화적으로 풀이해본다면 만일 두 남녀가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파악하고 나서야 사랑이 가능해진다면, 인류는 대가 끊기고 멸종했을 지도 모른다. 짧은 인상 속에 이성에 대한 모든 환상을 녹여,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 미치는 단계가 다가오고 지나가기 때문에 사람은 남은 인생 전부를 건 결혼을 할 수 있고, 후대에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보통씨는 낭만적 사랑이라고 했다. 서로 좋아서 결혼하는 것이 지금에야 당연해 보이지만, 중세 이후 꽤 오랫동안까지도, 결혼은 부모 혹은 가문의 상호 물물교환적인 의미가 컸을 테다. 보통씨가 이 책에서 말하기를 대부분의 낭만적 소설은 낭만이 결실을 맺는 단계 즉, 둘이 서로 눈이 맞 여러가지 시련을 이겨 결혼하는 단계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며, 환상일 뿐이며 그 이후의 일상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 사랑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굴레 속에서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하는 한 계속 이어지고 이 때부터가 훨씬 더 많은 삶을 결정한다.
딱 한 번 둘이 싸우는 장면이 카타르시스처럼 후련함을 주는데, 외도를 하고 돌아온 남자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여자에게 괜히 시비를 건다. 뭐 그렇게 뭐든 반듯반듯 정리된 상태로 사는 거 재미없다나 어쨌다나. 남자보다 수입이 적었지만 가사일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남자보다 많이 맡았고, 살림을 알뜰살뜰 꾸리던 여자는 흥 그러셔 어디 한 번 짜릿함을 맛보셔 하며 밀가루포대를 벽에 힘껏 던지는데, 그게 터져서 온통 밀가루로 범벅이 된다. 멋지구리. 이게 남자가 그랬으면 폭력이었을 텐데, 여자가 하니 저항(?)이다. 힘센 사람이 물건을 부수기 시작하면 공포감을 자아내고, 약자는 안위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비굴함과 회피 밖에 없지만, 약자가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다면, 끝장을 보고 싶은 거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외도가 비윤리적으로 비쳐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렌다는 것은 그 사람을 모른다는 걸 뜻한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한 때 완벽함이라는 환상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졌었지만 차츰 사라져서 뻥뻥 뚫린 그 빈 구멍들을 그의 결점, 실망스러운 사고방식, 예측하지 못한 행동 등이 채워가는 걸 의미한다.
일부일처제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들을 많이 했었는데, 다 스치고 지나갔다. 이 책이 소설이라는 점은, 둘이 심리치료사를 찾아, 서로의 내면 아이를 만나고 조금씩 서로를 더 이해하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기로 그렇니까 소설 답게 끝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