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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실용

[김주완,이승우,임원기] 대한민국 사생활의 비밀. 자 이제 비밀을 보여주시지요.

영화 타인의 방은 슈타지(Stasi)라고 알려진 동독의 국가보안부 비밀경찰의 감시를 소재로한 2006년도  독일 영화였다. 슈타지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수십만명의 직원을 고용해, 거의 40년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염탐했다. 내친 김에 영화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비밀경찰 비즐러는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중대 임무를 맡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영화 트루만쇼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획된 쇼 안에 자기의 모든 것을 노출해야 했다면, 두 정보 기관에 의해 두 사람만의 은밀한 대화까지 모두 노출된다. 국가만을 위해 존재하는 냉혈 인간 비즐리는 차츰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그 해 내가 보았던 영화 중 최고의 영화였다. 

 

대한민국 사생활의 비밀, 책의 제목과는 달리 이 책에는 비밀이 없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 추석 날, 으례이 관행처럼 뉴스 헤드라인에, 교통 정체와 고향 소식을 전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생활 속에서 대하는 수없이 많은 개인정보 침해(?) 사례들을 보고서처럼 정리하여 나열한 것 뿐이다. 

 

옥션이 털렸을 때에도, 네이트가 털렸을 때에도, 현대카드에서부터 여러 은행권의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들이 해킹에 마구 털려나가고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태연했다. 주민등록번호는 동네 만화 대여점 회원 카드를 만들 때조차 으례이 제공하는 개인식별번호이다. 누구나 다 안다. 그리고 주민번호와 이름의 조합이 있으면 신분 조작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 피해와 침해를 동시에 경험한다. 아이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부모의 주민번호를 이용해 각종 게임 아이템들을 사들이고, 어렵게 모은 게임 머니를 어처구니 없이 털리는 아픈 기억들을 경험하면서 커간다. 엄마들은 신규회원 쿠폰을 적용하기 위해 가족의 주민번호를 이용해 인터넷에 새 아이디를 만들고 쇼핑을 한다. 그것이 일상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개인식별번호인 주민등록번호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그것에 의해 어느 곳에서나 개인이 식별되고 있는 전세계적으로 전래가 없는 제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단지 무디어지고 무감각해져 있는 것 뿐. 미국의 사회보장제도 번호는 은행, 세무소 등의 몇몇 기관을 제외하고 그 번호를 개인 식별을 위해 요구하는  것 자체가 범죄이다. 지금은 오랜 캠페인 덕에 인터넷 가입시, 주민번호를 묻는 일이 줄어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이미 무수히 많은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하여 주민번호와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와 패스워드의 조합을 선택의 여지 없이 제공해주어야 했고, 그것들을 저장해왔던 서버들을 해킹으로 모조리 털렸다. 알려진 것은 일부일 뿐.  둔감한 보안관리 담당자들은 해커가 남기고간 시그내처를 확인도 안한다. 그분이 다녀가셨어도, 보안 담당자의 인사에 득이될 게 없으니 팀 내, 회사 내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일상일 것이라는 것도 훤히 짐작된다. 이미 내 개인정보는 한국의 각종  "선진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전동남아인이 사이좋게 나누어 쓰고 있다. 어느덧 한국의 네티즌들은 이런 나의 개인정보 남용에 대한 안전 불감증을 초월된 자세로 받앋들일 줄 알게 되었다. 

 

그런 마당에, 공공 장소에서의 CCTV,  본인 스스로 더 많은 남들에게 노출하기 위해 공개하는 SNS 콘텐츠들, 구글이나 애플이 수집하는 자신의 행적들, 이런 저런 데이터 잔해들을 모아 온라인 표적광고에 이용되는 빅데이터에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을 가질 여유가 없다. 공공 장소에서는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면 될 것이고, 내 행적을 표적 마케팅에 이용하는 것이 두렵다면 휴대폰의 GPS는 항상 꺼두면 될 것이고, SNS에서는 개인을 드러내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된다. 어렵지만 나름 개인이 주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주민번호를 만능의 개인식별에 이용하는 제도적 헛점은 이미 만연되어 불감증을 불감증으로 느끼지도 못할 만큼 생활의 부분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개인식별번호는 전아시아인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 그게 대한민국 사생활의 현주소이고, 책을 읽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니고,  그 언제도 비밀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사생활의 비밀 비밀이어야 할 것들을 합법적으로 노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에 대한 불감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