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
이 책은 크게 실용적 부분과 정치적 부분 두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방법을 서울대 A+ 학생들 1천여명의 설문에서 끌어낸 실용서이다. 다른 하나는 이 결과로부터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인문사회 책이다. 첫 파트는 서울대 최우등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해서 그 높은 학점 유지할 수 있었던게 대한 설문 내용을 자세히 싣고 있고,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국내 최고의 우등생들이 공부하는 방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서울대의 학생들이 미시간 학생들과 비교해 볼때 교육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에 대회 사회적으로 분석해보고 문제점을 짚어보는 교육 비판적인 내용이다. 물론 제목과는 달리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면 A+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게 이 책에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최우등 학생들의 설문 내용을 바탕으로 수용적 교육이 만연한 한국식 대학 교육을 분석하고, 성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목적도 그것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A+를 받는 학생들의 비결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A+를 받고 싶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같다. 하나는 교육의 대상자인 학생들을 위해, 또 하나는 교육을 실행하는 교수들과 정책 및 입안담당자들을 위해 국내 교육 현실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내용인데. 학생인 아들과 교육자인 남편 둘 중 누구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하고 싶으냐 하면, 성적이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대학생 아들이다.
첫번째 파트에서 다룬 내용은 학점 관리가 잘 되지 않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도 학점이 제대로 안나오는 대학생들에게 우등생의 공부법을 모방함으로써,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매우 실질적인 내용들을이다. 나 역시 대학을 다닐 때 시험장에서 시험지를 받아들고는 그 텅빈 백지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했던 기억을 아직까지 악몽처럼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학교에서 시험지를 메우고 점수를 받는 일은 일생 중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마도이 책을 읽었다면 그때 성적을 조금 더 잘 받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비결이 있으나, 가장 압도적인 방법은 교수가 하는 말을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속기사처럼 받아적으며, 심지어는 농담이나 기침소리까지 필기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나름대로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데, 우리 언어의 속성에는 글성이 강한 글과 말성이 강한 글이 있는데, 말성이 강한 글은 쉽게 이해되기 때문에 1차 필기에는 자기 방식대로 정리해서 요점만 적는 것보다는 교수가 말하는 말성이 그대로 전달되도록 그대로 적어야 한다는 거다. 수업시간에 교수의 말소리를 그대로 필기하고 나면 심지어는 당시에 이해가 안되던 부분이라도 복습을 하면서 이해가 되기도 하고, 특히 수업시간에 이해한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 내기 때문에 교수의 지식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대다수 노트필기를 자세히 하는 서울대 우등생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이다. 들을 때는 이해한 듯 싶어 요점만 적고 나면, 추후 복습을 할 때, 자세한 사항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들은 교수의 설명 그대로를 재현해 내기 어려울 수가 있을 것이다.
두번째 정치적인 부분이라고 내가 말한 부분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미국의 교육 현실과 비교해서 비판하는 내용이다. 서울대 우등생들의 설문 결과와 미시간 대학생들의 설문 결과를 비교, 차이점을 분석하면서, 특히 수용적 능력이 창의적/비판적 능력에 비해 월등하게 우세하다고 느끼는 한국 학생들의 차이가 실질적인 교육철학과 제도, 교습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학생들이 노트필기를 그렇게 자세히 하면서 교수의 수업내용에만 의존해서 수용적 방식에 의존하는 식의 공부방법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각계 각층의 리더를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서울대학교 교육 취지에 그러한 방식의 수용적 공부방법이 옳지 않으며, 그러한 공부 방식이 성공하는 이유는 바로 교수들이 그런 수용적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수용적 태도는 예능학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고 교수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성적에 유리하기 때문에,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모든 예체능학과에서 지도교수의 취향에 맞는 예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체능과 인문, 공학 할 것 없이 비판적이거나 창의적인 내용이 답안지에 추가되면 감점 요인이 되며, 이러한 학습 방법이 낮은 창의력을 갖는 인재들을 사회로 배출하고, 결국은 국가 경쟁력을 낮추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저자의 생각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긍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다른 의견을 갖는다. 일단 창의력이나 비판적을 객관적으로 비교할만한 잣대가 없다. 설문 내용은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결과 즉, 자신이 수용적 능력이 더 강한가 비판적/창의적 능력이 강한가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논쟁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창의력이 낮다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음에도 그 결정적 근거로서는 약하다는 사실이다.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유교적 관습이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누가 되는 행위를 자제하게 만드는 문화 혹은 너무 내다거나 잘난척하는 부류를 싫어하는 문화적 특징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기자가 오바마의 특별 배려에도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일반화시켜 갖다 붙이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라는 생각이다. 그건 그냥 거기 나간 기자들이 똘아이들이기 때문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판능력과 창의성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왜 그 일화가 번번히 이런 종류의 책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자학하는 방식으로 등장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고 화가 난다. 물론 우리나라 학회가 외국의 학회에 비해 질문도 거의 없긴 하지만, 학회 내 교수들의 권위적인 태도에 주눅든 일반 대학원 학생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학생과 교수 사이가 비교적 자유롭고 친구처럼 형성되는 외국(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과는 문화적 차이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크네스 테이블의 예를 들어 문제를 끌어내는 방식의 수업을 예찬하였는데, 정말 좋은 방법이라 하더라도, 그런 질높은 교육의 혜택이 모든 아이와 학생들에게 돌아가게 할 만큼의 예산이 있는가? 하크네스 방식의 수업은 6~12명 이내의 그룹당 한 명의 교사가 필요한데, 만일 그런 교육적 혜택이 모든 학생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하려면 인구 몇 명당 한 명의 교사가 필요할 것이며, 그런 종류의 질높은 토론 수업을 이끌만한 '훌륭한 교사'의 월급을 어디에서 충당할 것인가 하는 다층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또한 저자 자신의 아이가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보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가르친다며 분개했는데, 진정 '질높은' 교육을 원한다면 어느 면에서는 그 높은 질의 교육에 적합한 질높은 아이들의 선발권을 인정해야 하고, 만족스런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공교육 대신 선택한 사설 학원은 거기에 맞춰 교육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어쨌든 특목고에서 우수 학생 선발권을 준 것도 그런 '질높은'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 학원을 보내는 선택도 모두 '자유'라는 바탕위에서 만들어진 부작용인 것이다.
공교육이 잘못되었다. 바뀌어야 된다 라고 하는 건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창의성과 비판력을 저해하는 교육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건, 2009년 미국에 잠시 머물렀었는데, 그 때 TV에서 오바마가 토론 중 했던 말이 한국의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말을 한두번 한 게 아니다. 한국의 의료제도, 한국의 교육제도, 한국의 자동차 산업. 한국을 봐라. 받아들일 걸 받아들이자. 오바마가 그 유창한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는 걸 나는 들었다. 모든 아이들이 일정 수준의 수학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을 벤치마크 해서 낙후된 미국의 교육을 바로 잡아야 된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는 거다. 이건 TV에서 생방으로 직접 들은 말이다. 한국에 대해 본받아야 한다고 했던 건 교육 뿐만 아니었다. 제한된 예산과 현실적인 여건 하에서 보완적 교육을 찾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