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생초밥상 - ![]() 이상권 지음, 이영균 사진/다산책방 |
산과 들에서 찾은 아득히 그리운 먹거리들이 만들어내던 이야기는 가난만이 독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어권 사람들에게 풀(grass)이라는 범주는 수십가지나 댈 수 있는 채소나 나무의 이름과는 달리 9천종이나 되는 이 식물종 모두 뭉뚱그려서 그냥 풀이라고 부른다. 최근 읽고 있는 <정리하는 뇌>에서 읽은 내용이다(대니얼 래비틴 p66). 그들의 식탁엔 산과 들에서 막 뜯어내어 무친 향기로운 풀이 없다. 물론 평범한 우리의 식탁에도 그런 종류의 야생풀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나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풀을 뜯어 국과 반찬을 끓여먹던 기억은 우리들의 생활 습관에 지나간 풍경처럼 향수로 남아있다. 기억과 더불어 사라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먹거리는 유별나게 향수를 자극한다. 그 먹거리들 중 아직도 우리를 떠나지 않았으나, 우리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고, 그것들의 맛을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풀이다. 보리잎, 소리쟁이, 넘나물, 점나도나물, 광대나물, 뚝새풀, 주팝나무, 곰밤부리(벌꽃), 새팥, 댑싸리(지부자), 옥매듭, 쇠무릎, 피, 뱀밥나물(쇠뜨기), 무릇, 민물김, 황새냉이, 메꽃, 마름, 구기자. 하나의 챕터를 구성하는 하나의 풀이름들, 이렇게 21개의 풀들이 모여서 책이 되고도 남아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풀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다. 풀들은 자기를 뜯어 먹는 벌레나 짐승들을 이겨 내려고 독을 만들지. 그래서 벌레들이 많은 여름이나 가을에 나는 풀들이 독이 있지. 겨울이나 봄풀은 독이 없어. 특히 겨울풀은 독이 없어. 벌레들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파리가 깨끗하고 맘놓고 먹어도 되는 것이지. 예로부터 겨울을 난 풀은 산삼 보다 좋다고 했어. 그만큼 건강한 풀이라는 뜻이지. 병든 풀이나 안좋은 풀들은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다 죽어 버려. 살아서 추위를 견디어 낸 풀들은 건강한 풀들이야 074 세계 어떤 나라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풀들에 이름이 또 있을까. 풀들의 종류가 우리보다 더 많을듯한 아프리카나 동남아 쪽에서도 풀을 이렇게 뜯어다가 요리해 먹을까? 풀은 현대인의 좁은 눈으로만 보면 밥상에 봄의 향기를 가져다주는 낭만적인 음식이었을 수도 있지만, 초근목피로 춘궁기를 견뎠어야 했을 잔인했던 계절엔 생명을 지켜주는 절실한 생명들이었을게다. 눈밭 속에서 차거운 바람과 냉혹한 겨울을 이겨낸 생명력으로 허기를 달래고 기근과 아사로부터 지켜주던, 땅과 맞닿은 가장 낮은 곳의 식물들은 그래서 하나 하나 개별군들에게 하나씩 별개의 이름들을 가진 소중한 개체들이었던 것이다. 기억하고,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주면 비로소 밥상을 향기롭게 할 수도 있을, 흔하디 흔한 야생초들. 먹거리가 흔해진 지금, 허리를 굽혀 거친 흑을 파내 그것들의 생명이 이루는 환경을 파괴하면서 밥상에 변화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 향기를 알고,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오랫동안 우리 선조들의 궁색한 밥상을 채워주었을 나물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