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피엔스 - ![]()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김영사 |
이 책을 거의 한 달에 걸쳐 읽었다. 엄청 두껍다. 빼곡히 줄을 쳐가며 읽었다. 한 글자라도 놓치기 아깝고, 페이지가 지나가면 잊혀질 것이 아까와서 눈에라도 담아 두려 오래도록 두고 읽었다. 책의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짧은 리뷰에 그 내용을 정리해서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먼저 책의 성격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읽는 동안 수없이 많은 순간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이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특히, 이제껏 내가 가지고 있던 어떤 신념이나 가치관 같은 것들이 사실은 환경적인 영향으로 주입되고 강요된 종교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런 것들이었다. 평등이나 인권이나 뭐 그런 가치들 말이다. 두번째는 마치 순문학은 읽을 때 받는 느낌처럼 때로 우아하고 때로 칼같은 비유와 은유가 저자가 설명하고 주장하고 있는 사실들을 더욱 선명하게 전달한다.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 어떤 문장을 볼 때, 베껴서라도 갖고 싶은 문장 혹은 표현들이 있는데, 작가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평범하게 쓴 것 같은데도 그 비유나 은유가 너무나도 적당해서 갑자기 어떤 진리의 빛이 하늘에서 갑자기 내리 비추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는 역자의 센스도 한몫하는데 입에 착착 달라붙는 표현과 거침없고 서슬 퍼런 문장이 책의 컨텐츠를 더욱 빛내준다.
저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나 리처드 도킨스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이스라엘 태생의 비교적 젊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거시적 관점의 역사를 생물학, 인류학, 사회학, 미래과학, 종교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하는 책을 썼다. 처음에는 유튜브 강연으로 유명해졌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깔끔한 홈페이지도 그의 강의 유튜브 내용과 영상들을 많이 싣고 있다 (주소 www.ynharari.com). 빅 히스토리는 우주 전체의 역사를 빅뱅의 순간부터 다루는 경우가 많다. <사피엔스>는 우리 종의 발생부터의 긴 역사적 시간을 다루는데, 관건은 우리 자신을 뜻하는 그 사피엔스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거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건데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책 전반에 걸쳐 사피엔스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기법을 사용한 느낌이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부딪혀서 오랫동안 교육되고 주입되어 있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일은 엄청난 양의 분야의 지식과 그 모든 분야를 통합하여 깊이 있게 아우르는 통찰이 필요하다. 무명의 작가가 세계를 들썩이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을 때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스스로를 지구상의 한 종으로써 바라보고 현재 우리가 가진 가치 체계와 그를 받치고 있는 정치 경제체계를 종교로 바라보는 일이 독자에게 먹히려면 설득력을 가져야 하고, 그걸 해냈다.
전체 내용은 우리 종의 역사다. 따라서 전체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 이 네 개의 닳고 닳은 키워드로 이루어져있다. 알다시피 138억년 전 물질, 에너지, 원자, 분자가 등장하고, 45억년 전의 지구라는 행성이 형성된 후 38억년전의 생명체가 생성된 이후 온갖 종류의 행명체들이 진화와 멸종을 거듭하면서 인간종이 다른 동물을 능가하는 도구를 만들게 된 것은 2백만년의 역사중 지극히 최근 일인 500년쯤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주지시킨다. 인간의 뇌가 크니 어쩌니 하며 도구의 발달이 저쩌니 해도 200만년동안 그 발달된 커다란 뇌가 경쟁종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도구라고는 돌칼과 막대기가 전부라는 것이다. 직립보행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변화가 오늘날 침팬지보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를 만들었고, 침팬지를 이길 수 있는 총을 만들었다. 직립보행-> 손 사용-> 높은 시야-> 만성요통과 목통증 -> 분만 위혐(머리가 커지는 시기와 겹침)-> 이른 출산 -> 미숙아 ->사회적 결속. 이러한 연쇄적인 진화 과정을 통하는 동안에도 200만년동안 사피엔스는 생태계의 구석진 곳(아프리카 중앙)에서 포식자를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는 교체이론과 교배이론의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배운 것은 교체이론이고, 현재 유전공학이 발견한 증거는 교배이론으로, 유라시아인은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혼합, 중국/한국인은 사피엔스와 에렉투스의 혼합이다.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은 네인데르탈인의 DNA를, 호주원주민들은 데니소바인과 DNA를 공유한다. 어떤 식으로 진화했건 아프리카에 살던 사피언스들이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들이 사는 땅으로 간 후 그들이 멸종했기에 멸종의 원인이 호모 사피언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고유 언어 덕분이다. 녹색 원숭이도 동류들에게 "조심해 사자야"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은 더욱 정교하게 사자의 위치와 어떻게 사자를 쫓아낼가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사피언스를 독특하게 만든 능력은 허구, 즉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은 신화와 종교, 국가와 사상, 경제와 정치 체제 그리고 자유와 인권과 평등, 정의와 같은 현대의 가치체계 대를 잇는다.
오직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불가능한 일을 믿어버릴 수 있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바나나를 한 개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를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p49)". 물론 저자는 종교라는 섹션을 따로 떼어내어 인류의 통합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종교는 이 책 전체에서 일관되게 다른 무엇과도 연결되는 주제가 된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공통된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 집단의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난 원시 공동체라든가 고대 사회의 역사만이 아니며, 뿌리 깊은 종교 전쟁을 겪고 있는 아랍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공통의 국가적 신화에 기반을 두는데, 예를 들어 그들은 그들의 민족, 고향, 국기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편이 되어 상대 국가의 사람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으며, 법률 인권 정의와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믿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와 실체를 파악하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다.
다음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호모 사피언스의 특징으로 파괴를 들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유럽의 제국주의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많은 동물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다고 쉽게 생각한다. 저자는 태초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 자체가 생명의 파괴임을 서슴없이 주장한다. 바퀴나 문자나 화약이나 나침반등이 발명되기 훨씬 이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을 때부터 존재 자체가 멸종을 이끈다는 근거가 조목조목 제시된다. 10차례의 빙하기에도 살아남은 디프로토돈이 다른 90% 이상의 대형동물군과 함께 멸종된 시기인 4만 5천년전 사피엔스가 호주에 정착한 시기와 맞물린다. 이미 그들은 불을 질러 농경지를 만드는 화전법에 통달했으므로 덤불숲이라는 생태계에 적응한 대형동물들은 황량한 초원에서 쉽게 먹이감이 되어 죽었다는 설명과 함께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진화시키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이 8백년전 도착했을 때 2백년사이에 그곳에 있던 동물은 60%가 멸종했다. 수백만년간 북반구 전지역에서 존재했던 매머드는 사피언스가 도착하는 곳마다 멸종을 당하고 1만년 전 렝겔섬과 북극해의 외딴섬에 어찌어찌 살아남았는데 4천년전 인류가 도착한 이후 바로 멸종되었다. 인류는 '생태계의 연쇄살인범'이었던 것이다. 수렵채집인의 확산과 함께 멸종의 제1 물결이 농업혁명이후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멸종의 제2물결이, 그리고 산업혁명이 일으키고 있는 제3물결로 이어지고 있다.
유발 하리히는 특히 행복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거시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농업혁명이 왜 사기인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250만년간 인간이 먹고 살았던 것은 지구 상에서 스스로 자라 번식한 것들이었다. 동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호주와 미 대륙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나무가 어디에서 뿌리를 내려야 할지, 양떼가 어디서 풀을 뜯어야 할지, 어느 숫염소가 어느 암염소와 교배할지'를 인류는 간섭하지 않았다. '1만년전부터 인류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데 바치기' 시작한다. 9천년전 밀, 8천년전 완두/렌즈 콩, 5천년전 올리브나무, 3천5백년전 포도로 이어지는 동안 기원후 1세기쯤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행복하느냐는 것이다.
한 때 학자들은 농업혁명 덕택에 인류가 수렵 채집의 힘겨운 활동에서 벗어나 정착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믿었지만,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 수렵채집인들에 비해 인류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악한 식사를 했고, 여분의 식량은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방자한이라는 번역 맘에 든다. 인간이 주식으로 먹는 동식물들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리처드 도킨스 식의 기준에 따르면 밀을 비롯한,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했다. 결국 식물이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언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는 농담같은 저자의 말이 덧붙여지만, 그 농사가 개인을 불행하게 했으나 늘어난 인구 덕에 종 전체의 번성을 불러온 것은 맞다. 저자는 묻는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 살아있게 만드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하는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애초 없었지만, 그것은 농업혁명의 덫이었다는 것.
내 고착된 생각의 틀을 비틀어 놓은 또다른 부분은 농업혁명이 가져온 상상속의 질서, 즉 우리에게 심겨진 가치체계에 대한 성찰에 대한 부분이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과 미 독립선언문은 당대 보편적이고 변치않는 평등한 원리를 따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사피엔스의 신화일 뿐이다. 귀족과 노예와 여자와 가족간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했던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가 죽은 후 오랫동안 이상적인 사회질서로 자리잡았었다. 하라리는 오늘날 미국인들의 정신적인 기둥인 독립선언문 중 유명한 구절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를 예로 들며 우리가 함무라비 법전을 사회 질서로서 믿어왔던 그시대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이 거짓말을 신화처럼 믿는다는 사실을 생물학적 증거를 들어 짚어냈다.
우리는 우선 생물학적으로 '창조'되지 않고 '진화'했으며, 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 인간이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창조주'는 없고, 진화과정뿐인 개인은 어떤 목적도 없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기에 이 말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게 진화했으며, 이들은 변이가 가능한 모정의 특질을 지니고 태어났고 여기에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가 포함된다'. 거미나 하이에나나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호모사피엔스에게는 하늘이 부여한 권리가 없으며 인권도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중력과 같은 자연의 질서와는 달리 인권과 같은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다. 상상의 질서는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중국인의 대다수가 인과 예와 효룰 신봉하여 믿었던 유교라는 상상의 질서, 인권을 신봉함으로써 250년간 지속된 미국 민주주의라는 질서,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이제는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자본주의라는 상상의 질서들 말이다.
좋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은 모두 종교와 아니 신화라고 해두자. 신화에 불과하단 말인가. 조국도, 민족도 정의도 인권도 실체가 없는 강한 믿음에서 생겨난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평등과 인권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원래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피의 댓가로 인간이 쟁취한 것이다. 저자는 상상의 질서를 믿는 한 가지 요인으로 상호주관이라는 말을 쓰는데 많은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연결하는 의사소통 망 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상호주관이며, 역사를 움직이는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주관적이라고 말한다. 푸조는 CEO의 상상 속 친구가 아니라 수백만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회사이다. 마찬가지로, 달러화, 인권, 미국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십억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한다. 이런 상상의 질서는 상호주관적이며 모든 지구인이 한꺼번에 믿는 믿음인 상호주관을 깨려면 그 믿음보다 더 강력한 다른 믿음이 필요하다.
너무 길어져서 이정도로 마무리한다. 지엽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부분 몇 대목만 더 정리하면 최근 몇십년간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데 그 첫째 이유로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음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평화상을 종식시킬 노벨평화상은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센스있는 표현들이다. 두번째 이유는 전쟁 비용이 치솟는 반면 그 이익이 작아졌는데, 역사상 대부분의 정치체계에서는 약탈과 점령으로 얻은 전쟁의 포획물로 물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오늘날 부는 주로 인적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되어 있기에 중국이 가령 실리콘밸리를 침공하더라도 실리콘 광산은 없으며 '부는 구글의 엔지니어들과 할리우드의 대본과, 감독, 특수효과 전문가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평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수익성이 좋아져서, 전통 농업사회에서 평화가 딱히 프랑스인들의 지갑을 불려주지는 못했지만, 대외교역과 투자가 중요해진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평화는 훌륭한 배당을 낳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상 전쟁은 긍정적인 선이었으나, 우리 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초의 시대'다. 이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인 고리가 존재하는데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전면전을 벌이기 어려워졌고, 국민들이 설사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라도 사실상은 그들의 정부가 독립적 경제 독립적 외교 정책을 수행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