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를, 의심한다 - ![]() 강세형 지음/김영사 |
소설과 비소설의 구분은 불분명하다. 바로 전에 읽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도 노벨 평화상이라면 모를까 노벨 문학상을? 하며 의아해할 수 있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에 있다. 최근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만 봐도 많은 인물의 사실적 내용 전달이 대부분의 양을 차지한다. 소설이니까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지만 막상 읽을 때는 소설이라고 봐야할지, 다큐라 봐야할지 모르겠다. 강세형의 <나를 의심한다>는 시/에세이로 분류되어 있지만 소설적 느낌을 주는 이야기를 다수 포함한다. 물론 에세이는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글이므로, 창조된 허구가 개인의 경험으로 변신하거나, 약간의 사실을 모티브로 해서 상상력으로 채운 창작작품이라 해도 여전히 에세이가 될 수 있다. 소설이라 해도, 여전히 새로운 형식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예술의 속성 상 에세이가 전하는 이야기를 하나의 소설로서 읽어도 무리가 없을 작품들이 있다.
이렇게 에세이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의 이점은 소설이라는 보다 더 예술적 감각으로 재단되는 형식에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있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까만색 글씨와 파란색 글씨가 그것을 구분하는 것 같다. 어떤 것이 소설같은 이야기를 전달하는지, 어떤 것이 작가의 이런 저런 생각들과 사소한 경험들을 전달하는지. 파란색 글씨는 단막 소설, 단편 소설로 읽어도 좋다. 다만 그 의미를 낑낑대며 고민할 필요 없이 작가가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미 고민했으므로 그걸 읽기만 한다. 아늑하고 쉬운 독서 방법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의 친구들, 작가가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 혹은 가족 등이다. 그래서 만일 완전한 트루 스토리를 책에 담았다면 그 친구들은 친분을 이용해 자신의 사생활을 적은 것에 대해, 뭐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영광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들의 이름은 알파벳 대문자 한 자이다. W는 라디오 방송 작가를 꿈꾸며 막내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나, 똥을 눌 시간조차 없어서 사라진다. Y는 스물 아홉에 죽는 매일매일 똑같은 꿈을 꾼다. D를 사랑했던 E는 사랑이 끝나자 D와 함께 했던 모든 관계들과도 단절되는 것을 경험한다. 작가 지망생 J는 저절로 저절로 손가락이 움직여 그림을 그리는 소녀의 꿈을 꾼다. W는 여자와 사랑을 할 때마다 몇번째 사랑인지 번호를 매기고 더러운 벽에 흔적을 남겼다. 사람 얼굴 인식 불능증에 걸렸지만 목소리는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L은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목소리 기억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진다(정말 (正) 말입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책만 읽고 혼자 지내는 A는 어느날 안경이 깨어져 오래 전 그러한 자신의 닫힌 문 때문에 상처받고 떠난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특히 L 이야기가 담긴 <정말 정 말입니다>와 <저절로 그려지는 그림>은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흥미 진진한 이야기였다. 여자 정혜처럼 고립된 이야기의 근원을 풀어나가는 J의 이야기 전개도 좋았다.
까만색 글씨는 일반적인 쉽게 읽히고 쉽게 잊히는 에세이들이다. 주로 나이에 대한 생각, 직업에 대한 생각, 자잘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들로 이루어져있다. 친구들과도 늘상 하는 종류의 얘기들. 일상에서 발견되는 자잘한 물음들, 발견들. 왜 착한 남자들은 모두 버스를 타고 떠나나. 스무살이 되어도 서른살이 되어도 마흔살이 되어도 두려움은 떠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것, 늙는다는 것은 세상이 탐탁치 않은 것이 많아지는 것이고 그 무엇에도 반하는 것 없이 무덤덤해지고 차가와지는 것이라는 그녀의 탄식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스무살의 여름에 쨍쨍한 공기를 가르던 웃음소리, 비처럼 내려 경련으로 떨었던 아픔, 온몸으로 웃고 온몸으로 울 수 있는 시간을 그리워한다. "당신이 무엇이든 무엇이든 반하고 싶다." 그 절박함을 이해한다. 살아있기에.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고 싶은 욕심. 그러나 나는 다시 그날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선택의 기로에서 수없이 방황했던 그 불안했던 과거로.. 그러나 기억해 내고 싶은, 돌아가고 싶은가 그 겹겹이 쌓인 과거들은 현재가 만들어낸 미화된 환상일 뿐이다. 현재가 남은 인생을 살아내기에 필요한 망각과 상상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과거.
우리는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너무 가혹한가? 저자는 저자의 친구가 고전만 읽게 된다는 말에 발끈한다. 현대인들은 모두 작가가 아닐까. 종이에 인쇄되지 않을 뿐이지 작가들이 사유의 흔적을 인쇄하고 자신에 대해 끝없이 다양한 변주로 이야기를 하듯 우리 역시 끝없이 흔적을 남기니 말이다. 이렇게, 혹은 더 짧은 140자의 트위터 속에, 포샵으로 편집된 눈이 붕어알처럼 동그랗게 나온 얼짱 각도의 사진과 이모티콘 이라는 언어를 이용해서 말이다.
작가는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원래 일이란 그것 빼고 다 재밌으면 일이다. 라는 선배의 말은 공감된다. 만일 내게 책읽는 일에 강제성이 있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호시 탐탐 책읽을 시간만을 노리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글을 써서 먹고 살기에, 글을 쓰는 일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일들, 그 과정을 또 글로 쓴다. 독자들은 그것을 읽는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은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끌어내야 하는 일이므로, 자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하는 일이므로 다른 어떤 육체노동 못지 않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40이라는 나이에 의미를 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은 않다. 그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경험한다. 만난다. 헤어진다. 본다. 느낀다. 그 속의 상처, 그 속의 깨달음, 그런 것들과 함께 고스란히 나이테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들의 현재다. 현재 나의 생각, 현재 나의 직업, 현재 나의 습관. 그 숫자가, 그 숫자만큼 살아온 시간이 그 시간 속의 인연과 만남과 경험이 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어떤 하나의 잣대나 무슨 상징으로 하나의 그룹으로 무엇으로 만드는 시도는 저속하게 느껴진다. 노인들은... 애들은.. 아저씨들은... 10대들은... 30대들은... 그런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건, 그 숫자들이 품지 못할 개인의 경험, 개인의 생각들이 나이라는 환상을 덮을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게 나이듦에 대한 푸념 대신 하루 하루 더 짧아지는 남은 인생을 적극적 삶으로 이끄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들이여 이제 나이 타령 좀 그만하면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