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소한 것에 삐치고, 한 번 삐치면 회복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뒤끝도 한없이 긴, 배 나오고, 머리 듬성듬성한, 오십 넘은 쓸쓸한 인간.' 이것은 '아빠'의 새로운 정의다. 김정운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의 글 <왜 그래? 아빠처럼>에서 그의 가족들이 아빠라는 말에 담은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뒤끝 없는 사람도 있고, 머리 숱 많은 사람도 있고 근육질에 탄탄한 체형을 갖춘 아빠들도 있다. 가정마다 제각기 다르겠지만 '아빠'에게 적용되는 정의에 들어가는 공통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쓸쓸함일 것이다. 남자가 나이먹어가는 것에는 쓸쓸함이 따라다닌다. 중년 남자의 쓸쓸함은 가끔은 딱하고, 가끔은 애틋하고, 또 가끔은 안타깝다. 그들에게도 한 때는 사랑스럽고 달콤한 어린 시절과 북적이는 젊음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한 때는 부드러운 미소와 대화가 있었는데..
이 책은 알랭 레몽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 지나온 시간들에 바치는 연가다. 자전적 소설인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두 개가 실려있다. 두 작품 모두 모두 작가 알랭 레몽의 인생을 어린 시절부터 훑어 오지만, 서로 내용적으로 보충해주고 각각의 구멍을 메꾼다. 두 작품은 별개의 주제와 흐름을 가진 독립적 소설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가족과 더불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더듬고,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보다 개인적인 이야기, 주어진 교육환경 속에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가고 사고의 틀이 변화해갔는지를 조명하고 소년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고 작가가 된 이야기 모두를 담고 있다. 두 소설 모두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주 조금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실린 두 개의 개별적 소설 모두 아버지를 위해 쓰여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끝부분에서 그는 아버지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했다. 트랭 이전에 살던 두 개의 집은 허물어졌고, 주무대였던 브루타뉴 지방 트랭의 집은 팔려버린 후다. 평생의 정서적 에너지로 남을 행복했고 아름다운, 그러나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형성된 그곳에서 두려웠던 존재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서적 휴식처이자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정신병을 앓던 누이가 죽었다. 소설을 쓸 때 작가의 나이와 돌아가실 때 아버지의 나이는 쉰 세살로 같다. 꿈 속에서 그와 둘이 마주 앉아 그에게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아버지, 그는 아버지가 무엇을 기다리는 지 안다. 그는 아버지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서?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열형제를 먹여 살렸다. 무엇을 누구에게 용서받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만큼 산 작가가 아버지와 풀지 못한 숙제는 무엇이었을까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자신이 살던 트랑이라는 마을의 집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덧없이 흐른 시간을 유일하게 품고 기억하는 장소가 집이다. 어릴 때 살던 집안의 구석구석에는 온갖 추억들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살던 식구들이 하나 둘 떠나고 명절이 되면 다시 각지에 살던 형제들이 돌아오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 집은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덧없는 곳이 되어 남에게 팔린다. 트랑의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10명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정겹다. 더불어 내가 살은 인생, 내 부모가 해준 부모가 살았던 인생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리서 이 책을 읽으면 그리움과 애틋함을 함께 읽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몇은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난다. 그게 바로 삶이다. 어느 가정에나 있는 일이다 마치 땅거미가 내릴 때처럼 그 불확실한 순간, 하나의 역사가 끝나고 다른 역사가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이제 다른 방식으로 가족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추억과 향수의 몫을 인정하고 아직도 잘 짐작이 가지 않는 다른 것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혼자가 되셨다 109
부모와 10명의 아이들이 복작복작 모여 가족을 이루고 살던 정겨운 날들의 풍경은 한국전쟁과 급격한 경제 발전을 경험한 우리 부모세대와 많이 닮아 있었다. 부모와 아이들은 2차대전의 빗발치던 공습과 피난을 치렀고 빗발치는 전쟁의 포화속을 뚫고 모두 살아 남았다. 알랭의 가족과 비슷한 대부대의 가족 속에서 일찍 아버지를 잃고 국토의 최전방에서 가까운 곳에서 한국전을 치러냈던 내 엄마의 이야기와 겹쳤다. 늘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었다던 부모의 세대가 이제 겨울이면 뜨끈뜨끈한 바닥에서 자고 여름이면 쾌적한 공기가 습한 더운 공기를 차단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알랭의 형제들은 수도도 전기도 없는 단칸방에서 오골오골 지내고 부엌에 목욕통에서 커튼을 치고 장작불로 데운 물로 차례로 목욕을 한다. 저녁마다 열명의 아이를 차례차례 한 명씩 매일 목욕시켰을 알랭의 어머니, 아침마다 여덟명의 아이를 깨워 수돗가로 업어가 턱받이를 씌우고 세수를 시켜 학교를 보내던 내 어머니의 아버지. 그렇게 자상하던 내 엄마의 아버지도 병으로 알랭이 아버지를 잃던 비슷한 나이의 내 엄마와 8형제를 두고 돌아가셨다. 처음 TV가 들어오던 날의 기억처럼, 처음 전화기가 들어오던 날의 기억과 처음 냉장고가 들어오던 날의 기억처럼 알랭의 시대에 처음 수돗물이 나오던 날과 처음 전기가 들어오던 날의 소란들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조금씩 문명의 이기들이 불편함을 대체하고 채워지는 과정은 언제나 정겹다.
행복이 공기의 입자를 타고 햇빛 비치는 창 가득 떨리는 먼지처럼 지면을 채운다. 그 정겨운 풍경속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다. 언뜻언뜻 비치는 희미한 그림자가 아버지의 실체를 암시하기는 하지만, 즐겁게 깔깔대는 대식구의 소란 속에 아버지의 이미지는 좀처럼 가시적이지 않다. 아버지는 이러한 즐거은 일상의 풍경의 반대쪽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버지는 행복 속에 내재된 불행에 대한 기억이다. 심연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걸어들어가 검은 그림자를 조심스럽게 들춰내면 전투 장면이 재생된다. 티없이 맑고 행복한 어린 아이들의 눈에 비친 부모의 싸움은 평생동안 각인될 두려움이다. 전쟁마저도 영웅담이 되던 그 시절의 향수 속에 숨어 있는 검은 그림자는 바로 아버지의 존재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들어온다. 집에 와서는 어머니와 싸운다. 밤이 되면 아이들은 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를 듣는다. 환한 대낮의 유쾌함과 저녁 이후의 부모님의 다툼. 이렇게 아버지는 작가의 어린 시절을 두 종류의 질적으로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나눈다. 트랭에서 유년의 행복은 그 속에 내재된 더 큰 불행을 감추기 위해 더욱 강화되었을지 모른다. 어둠이 내리고 아버지의 존재가 고함과 욕설과 주먹질을 몰고 부부간의 전쟁을 향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아이들은 '계속 살아가기 위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의식의 놀이들과 마법의 세계에 들어앉아 행복의 문을 닫고 그 속에 꽁꽁 몸을 숨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칠듯한 행복을 이기지 못하며 매일 매 순간을 그윽하게 음미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저녁마다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모두가 다 함께 뜨거운 가족애 속에서 진하게 살고 있는 바로 그때 가정의 심장부는 모든 것이 타버린 재에 불과하다.75
가족들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저녁 늦게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싸움만 벌이는 아버지의 전혀 다른 모습을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에서 우연히 목격한 12살 소년 알랭은 충격에 빠진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대화를 하며 다른 사람을 웃기는 밝고 유머러스한 인기 만점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훗날 아버지의 장례식날 또다시 놀란다. 교회가 미어터지듯 도처에서 몰려든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받는 인물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원히 수수께키에 쌓인 채 돌아가셨지만, 그는 아버지가 가족에게 주지 않은 것, 파괴해 버린 것들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의 죽음 이후, 더이상은 집안에 싸움도 폭력도 더는 없을 것임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하지만, 죽기 직전 한 명씩 아이들을 불러 표현했던 마지막 사랑의 말들로 그의 내부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어렴풋이나마 의식하게 된다.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하고 죽을 때에야 고백하듯, 간직하라는 듯, 남기고 간 표현. 아마도 그 때문에 그는 아버지 죽음 이후에도 숙제처럼 아버지에 대한 풀지 못한 감정들을 안고 살아간 듯하다.
두 분 사이의 그 전쟁에 대해서 나는 한번도 말해 보지 못했다. 그것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그리고 침묵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간다. 그리고 너무 늦어 버린다 132
일상중 아버지의 부재는 어머니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한다. 어머니는 억세고 드센,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을 한국의 어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많은 자식들을 낳아 기르면서 집안을 쓸고 닦고 전쟁의 파편들을 기념품삼아 반짝반짝 윤기나게 닦고, 그 무거운 빨래들을 담은 수레를 끌고 빨래터까지 가서 깨끗하게 빨래를 하고, 꽃과 태양을 사랑하고 읽는 것과 쓰는 것을 좋아하고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과 서신 교환을 자주 하고, 어린 형제들이 마당에서 역할놀이를 할 때면 함께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주곤 한다. 아이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즐겁고 재미있는 어머니가 있다.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이웃 사람들, 상인들, 지나가다 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축복받는 시간들을 공유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머니와의 유대 속에서 아버지는 설 자리를 잃었던 것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다. 어머니와의 강한 유대감 속에서 어머니의 적수가 된 아버지들은 낄 곳이 없다. 책임과 의무가 무겁게 눌렀을 때, 권위를 가장한 소외가 덩그마니 남겨진 것이다.
집요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그 이미지다. 저녁에 길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는 즐거움과 어머니가 부새 부인과 나누는 그 노래 같은 대화. 그것은 마치 단도로 곽 찌르는 듯 내 몸이 사방을 뚫고 지나간다.136
너무 좋았던 시간들이 이젠 다시 올 수 없으며, 영원히 하루하루 헤어짐이었음을 알기에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면 비수로 찌른 듯 아플 때가 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머물러 있는 줄 알았던 어린 시절과 청춘을 하루 하루 이별하고 살고 있었지만, 이별을 깨닫는 건 훗날의 일이다. 장소에 대한 회상은 달콤하지만 아프다. 그 장소 속에 그 이별,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자취가 상실의 상처를 건드리며 가슴을 찌르는 아픔으로 되살아난다. 작가 역시 이제 트랑의 집이 팔렸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과거의 이미지는 자주 과장되거나 미화되지만, 미화 속에 있던 아픔까지도 아름다움으로 남겨지는 이유는 그 과거로의 지점은 이미 떠나온 곳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