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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떠나신..

[도서]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저/이세욱 역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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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만큼 수식하는 말을 많이 가졌던 사람도 드물 것 같다. 기호학자이고 미학자에, 철학자, 역사학에 소설가라는 다양한 방면의 전문영역이 보여주듯, 그는 6~7개의 언어에 통달한 언어의 천재였다. 자유분방한 의식의 흐름 곳곳에서 생생하게 포착되는 무한한 분야의  해박한 지식은 샘솟는 물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지만, 이제 에코의 호탕한 이미지는 표지에 박제된 채로 우리 곁을 떠났다. 씨실과 날실의 규칙적 조합을 넘어선 방대한 지식의 복잡한 직조 방법으로 독자는 자주 그의 책에서 길을 잃지만, 그의 책들이 꾸준하게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는 해학과 풍자로서 포용한 익살맞은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의 문학 잡지 일베리지에 <아주 작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과 이후 같은 형식으로 쓴 글들을 모은 책으로, 해학적 코드로 풍자된 패러디풍의 글에서부터 단순히 개인적인 일상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잡문들, 때로 진지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글까지 매우 다채로운 에코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에코의 책이 난해하다고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책이다.  사회 비판과 과장적 풍자를 패러디라는 형식으로 전달하는 글들이 주를 이루는 것 같지만 순수하게 재미만을 위한 코믹한 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짧고 가벼운 풍자성 위주의 <실용처세법>, 단편 소설과도 같은 느낌의 패러디물 <성조기>, 나쁘다는 말의 카코와 교육이라는 뜻의 페디아라는 말을 합쳐 만든 나쁜 백과사전 혹은 반지식 백과사전으로 번역되는 <카코페디아의 발췌 항목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향과 어린시절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산문 하나로 이루어진<내 고향 알렉산드리아> 이렇게 성격이 매우 다른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실용처세법에는 여행하기에서부터, 서로를 이해하기, 스펙터클 사회에 살기,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처하기, 정치적으로 반듯한 사람이 되기책과 원고를 활용하기, 전통을 이해하기, 미래에 대처하기 등으로 구분된 깨알같은 '처세법'이 소개되는데, 이 글들에는 원고가 쓰여진 당시의 사회 풍속들과 기술 문명 속에서 이해해야 가능한 것들이 다수 있다. 특히 바쁜 일정 때문에 비행기와 호텔 등의 세계 각국의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포착한 불편한 기내식 풍경을 재치있게 풍자했고, 호텔과 택시 등의 이용시에 생기는 여러가지 불편함들도 짤막짤막한 글 속에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하는 방법>과 <재산 목록을 작성하는 방법>은 관료적 행정의 끝에서 시민(과 교수로서)이 겪어야 하는 고초의 끝을 보여주는 딱하기 짝이 없는 에코 본인의 경험담인데, 한편의 코믹 소설로 각색을 하더라도 이보다 더 생생하고 재미날 수 없을 듯했다. 


"모름지기 연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언뜻 보았을 때, 그에 대한 신뢰와 지원이 아주 신속하게 결정되어야만 진전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비피테노에 있는 의자 하나를 옮기려면, 키바소·테론톨라·아프라골라·몬텔레프레·데치모마누[5] 등과 같은 기초 자치 단체들의 의견을 물은 뒤에 로마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막상 의자를 옮기고 보면 그것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 난 뒤이기가 십상이다."


특히 1980년대 말 막 개인용 컴퓨터가 인류 문명의 일부로 흡수되면서 생겨나는 우려와 불편함과 어리석음들을 경험하는 첫 세대로서, 기술적으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해온 에코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에 포착된 당시로보면 이해되지 않을 일화들을 재미있게 엮은 글들이 흥미롭다.  시끄러운 휴대폰 사용자와 팩스기로 전달되는 각종 광고들 때문에 팩스 용지와 전기세와 전화선 그리고 잉크에 돈을 들여야 하는 것들에 대한 불만을 적은 글들은 그것들이 비록 시의성에 적절하지 않음 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회상과 스마트폰과 이메일로 대체된 현재의 최신기술이 사회에 일으키는 문제들과 비교해서 여러가지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에코는 새로운 기술로 개발되어 팔리는 신제품의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여러 글에서 언급했는데, 당시 60불인 <맥박단련기>는 달리다가 심장에 이상 신호를 감지하는 알람을 감지하는 기계로서, 저개발국가 사람들은 뜀박질을 하다가 숨쉬기 힘들면 그냥 멈추는데, 높은 콜레스테롤로 숨이 턱에 닿아 죽기 일보직전까지 달리기를 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조롱이 가득하다. 



전혀 다른 성격의 글들이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 에코의 어린 시절과 고향을 회상하는 마지막 글이 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에코의 고향은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토 지방의 알렉산드리아로, 그는 이 책의 마지막 글을 <미개인들>이라는 풍자적 제목으로 자신의 고향에 헌정한다. 단테는 그 지방 사람들의 언어는 이탈리어 방언이라 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언어라고 보기 어려울만큼 거칠다고 했는데, 에코의 단테를 언급한 것은 라틴계와 구분되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역사적인 정체성을 나타낸다. 그 지방사람들은 투박하고 털 많은 리구리아족의 후예라고 여러 문헌이 전하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지 아이네아스에서 노래한 이 리구리아족은 '본바탕이 거칠고, 굳센 종족으로 갓태어난 아기를 얼음으로 아이들을 단련시'키는 강하고 미개한 종족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에게 그 미개인들이 사는 고향은 안개 깬 더블린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현과도 같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현현이란 추억으로 간직될 만한 어떤 것이 말이나 몸짓이나 생각 속에 갑작스럽게 발현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어떤 대화, 저녁 안개를 뚫고 홀연히 나타나는 시계탑, 썩은 양배추 냄새, 갑자기 두드러져 보이는 어떤 하찮은 물건, 조이스는 안개 낀 더블린에서 그런 현현들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러고 보면 알레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플보다는 더블린을 닮았다."


사람의 이름을 친근함의 매개로 이용하는 대부분의 서구인들과 비교되는 그들의 문화는 어쩌면 우리 한국인들에게 친숙해보인다. 그렇게 시작되는 고향 도시에 대한 생각은 전쟁중의 어린 시절의 회상과 이어지고 마침내는 그 도시 공간의 현현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는데, 인적이 끊긴 알렉산드리아는 사하라보다도 더 광막하다. 말수가 적고, 간단한 몸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길을 자주 잃는 이유는 도시의 공간적 특징이 결집의 중심은 없고 분산의 중심만 있기 때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거대한 사막에서 열에 들뜬 청소년기'를 속절없이 보낸 그 곳에서 지낸 시간들은 그 이후 리구리아족 미개인들의 도시를 떠나와서 토리노 대학에 들어갔을 때 확연히 실감한다. 에코는 이질적인 문명인 프랑스인들이 건네던 '안녕? 어떻게 지내니?' 식의 다정한 인사말이 자신의 도시에서 통하던, '야 바보 잘지내냐'라는 식의 투박한 방식의 인사말의 문화를 바로 알아차렸고, 80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문화의 차이를 자신이 가진 도시의 정체성으로 느끼기에, 자기 고장의 문화를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고집했다. 


"도시가 자욱한 안개에 휩싸이면 텅 빈 공간들이 사라지고 예기치 않던 벽면과 모서리와 모퉁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우윳빛의 단조로운 배경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다. 마치 갓 그려진 형태들이 무(無)에서 튀어나온 느낌이다. 그러면 알레산드리아는 〈아름다운〉 도시로 변한다. 알레산드리아는 자기를 감추려고 애쓰면서 어둑어둑해져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도시이다. 이 도시의 진면목은 햇빛이 아니라 안개 속에서 찾아야 한다.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천천히 걷는다. 방향을 잃고 헤매지 않으려면 길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도 마침내 어딘가에는 다다르게 마련이다."


"우리 아이들도 내가 일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애정과 에너지와 자신감을 줌으로써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의 일에 대해서 보여 준 아이들의 철저하고 초연한 무관심에 감사한다. 그 덕택에 나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지식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하면서 이 칼럼을 마감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고마워할 것이 또 있다. 그들과 가장 친하게 어울려 다니는 녀석들의 머리 모양은 나의 감성과 배치되는 미적 기준을 따르고 있다. 나는 우리 집 복도에서 그 녀석들과 마주치기보다는 차라리 서재에 홀로 틀어박혀 이 칼럼을 쓰고 싶었다. 그 완고한 의지가 내게 늘 많은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신이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마땅히 사형수가 버둥거리고 껄떡거리고 지지직 타들어가고 소스라치고 움찔거리고 콜록거리다가 저의 더러운 영혼을 하느님께 되돌리며 숨을 거두는 장면을 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더 솔직했다. 그들은 처형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표를 샀고, 죽어 가는 사형수를 보면서 미친 듯이 좋아했다. 당신 역시 사형이라는 최고의 정의를 지지한다면 먹고 마시면서, 아니면 무엇이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좋아해야〉 마땅하다. 사형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마치 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


"그러면 사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당연히 사형 집행 장면을 보아야 한다. 예상컨대 그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나는 충수염 수술이 정당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식사 중에 텔레비전을 통해 그 수술 장면을 지켜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지금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외과 수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인간 생명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식의 반박은 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