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와이즈베리 |
대중에게 코끼리를 떠올리게 하는 방법은, 어떤 진실을 코끼리 라는 단어 속에 가두는 것이다. 그들의 뇌 신경 회로에 코끼리라는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주입하는 것이다. 그들의 가치를 코끼리에 심고 계속해서 그 말을 언급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코끼리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아야지 라고 스스로 말하는 순간 우리는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코끼리가 품고 있는 개념들이 심겨지고, 사람들은 코끼리라는 프레임 내에서 사고하게 된다. 커다란 몸, 어슬렁 거리는 걸음걸이, 코를 휘두르는 행동 그 무엇이 되건 코끼리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프레임을 부정할 때에도 그 프레임은 활성화된다(p11).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후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순간 전국민은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바마의 미국의료보험에 대해 보수가 정부의 장악이라 공격했을 때보다, 대통령이 직접 '이는 정부가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을 때 청중의 뇌 속에 장악이라는 생각이 활성화했다.
어떤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우리는 그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들을 놓치게 된다. 프레임 속의 작은 세상 속에서 그 프레임이 의도한 잣대로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프래임들에는 낙태를 무시무시한 과정으로 바라보는 '부분출산낙태', 모두를 위한 '저렴한 건강보험'을 대치한 '정부의 장악', '사망선고위원회', '오바마케어' 들이 있다.
그들의 언어를 더 살펴보자. 보수주의자들은 지구온난화 대신 기후변화라는 말을 공적 담론에 끌어들였다. 변화는 인간의 개입 없이도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에 대해 건강한, 깨끗한, 안전한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진실을 호도한다. 미국의 '깨끗한 석탄' '깨끗한 하늘 법안'은 오염을 가중시키는 법안이라고 한다.천연가스의 지속적 시추에 대해 '에너지 독립'이란 말이 제안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청정 에너지라고 부르고 핵발전소 대신 원자력 발전소라고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가치체계,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의존한다.
조지 레이코프는 말한다. 기억하라고.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의존한다. 이 말을 기억하라고. 이것은 진보를 지향하는 우리들이 까먹지 말고 휴대폰처럼 언제 어디서고 늘 지니고 다녀야 할 말이다. 이것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중요한 가치체계이기 때문이다. 조금 길지만, 퍼온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납세자들이 지불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부를 이룩한 것(62)'이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다. 전력망, 공립대학, 각 주를 서로 연결하는 고속도로 체계, 공적 자원에 힘입어 컴퓨터 과학 및 모든 컴퓨터 기술 분야를 창출해 낸 과학 연구, 원거리 통신과 인터넷을 가능하게 한 위성 통신, 현대적 의료, 공항과 항공교통 관제 체계, 공군을 통한 조종사 교육, 질병통제센터와 식품의약국, 환경보호국, 국립공원과 천연기념물 관리 체계, 공적자원의 관리 체계, 낡고 부패한 매관매직을 대신한 공무원 제도 등, 이 목록은 끝이 없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가장 큰 공적은 이 모든 공적 자원이 제 기능을 관리하고 보장하는 공공 체계, 즉 이런 직무를 감당하는 정부(통치체제)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없다면, 현대 미국의 개개인과 사기업은 지금과 같은 사적인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107~108)
감정이입과 개인과 사회 전체의 책임을 균형있게 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시각과는 달리, 오로지 개인의 책임만이 옳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이 생각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혐오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은 나쁜 것, 구제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1970년대까지 세금은 꼭 필요하고 많은 경우 존중받아 마땅한 공적자금이라는 개념이 과세가 부담이라는 개념으로 바꾸고 세금으로부터의 구제 라는 프레임에 보수와 중도 뿐 아니라 진보적 담론에까지 파고들어버렸다. "올바르게 말하고, 반복해서 말하자. 사는 공에 의존한다는 개념을 보수 세력이 이해할 중요한 개념, 즉 자유화 연결하자. 공적자원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자유를 허락하며, 온갖 종류의 삶의 기회를 열어준다. 공적 자원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야말로 바로 이 공적자원을 민주주의의 중심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116쪽)."
그렇게 자신들의 가치에 강한 프레임을 심어 놓는 일에 대한 연구와 실행을 미국 보수들은 수십년째 해오고 있다. 진보들이 그들은 어리석지 않다. 그들은 똑똑하기 때문에 이기고 있다. 가난한 보수들이 자기 이익에 반하여 공화당에 투표하는 일은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동일시하고픈 대상에게 투표한다. 자기의 정체성에 투표한다(p51). '세금구제'라는 말 속에는 보수주의자들의 가치가 가장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세금을 내는 것이 고통이라는 이미 자리 잡은 프레임에 호소하기 위해 다른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없다. 진보들이 저인지 현상에 시달리고 있을 동안, 그들은 세금구제 라는 프레임을 통하여 보수의 가치가 필요한 부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익과 반하는 가난한 사람들까지 공화당에 헌신하게 만들었다.
살짝 딴길로 새서, 저인지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인류학자 밥 레비의 연구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1950년대 타이티에 높은 자살률이 '비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통을 느끼고 경험하지만, 그 경험에는 이름도 개념도 없고, 그래서 그 경험을 설명할 길도, 비통을 치유할 의식도, 말도 위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절실히 필요한 개념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높은 자살률로 이어졌다는 설명은 살짝 사이비 같은 느낌도 들지만, 안개처럼 흐릿한 무언가를 싹 걷어내는 명쾌한 해답일 것 같은 감정적 동요를 일으킨다.
2004년에 초판이 쓰여졌고, 많이 읽혀 정권까지 바꿨다지만, 책을 읽기 전에는 프레임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책은 코끼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코끼리를 생각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제목이 말했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언제 나오나 하면서 읽다가 내가 읽는 내내 코끼리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을 발견했다. 그것이 프레임이다.
보수냐 진보냐 하는 것의 쟁점은 국경이 없다. 두 가지 가치 중 무엇을 추구하느냐의 문제는 유니버셜한 문제다.
1.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아버지 두 개의 서로 다른 아버지 상을 미국의 보수와 진보의 차이에 대응한다.
2. 공감과 감정이입은 진보의 가치이다. 사회 전체의 공적 자금으로 이루어지는 혜택을 일부 부자들만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가 우리들의 가치이다.
3. 사적영역은 공적 영역에 기반한다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 언어학자의 창시자로, 뇌의 신경 회로가 사고와 언어를 불러일으키는 과정에 대해 많은 저서를 츨판했지만, 이 책은 그런 전문적인 내용이 아니라, 쉽게 쓰여졌다. 필요한 부분은 수없이 반복하고, 진보주의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정리해서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추구하는 가치에 확고한 신념을 보태도록 도와준다. 무엇보다도, 일상 중 , 그러니까 명절날 친척 부모 어른들과 주요 현안에 대한 문제들을 부딪혔을 때에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떻게 행동할 지를 알려준다. 구체적인 예로 진보들은 세부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해 파고 들기를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세부 정책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원칙이 무엇인지, 어떤 이상을 대변하는지, 이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려고 하는지에 대해 말하라는 것이다. 공적 담론에서는 가치가 정책을 이기고, 원칙이 정책을 이기고, 정책 방향이 구체적 프로그램을 이긴다(241)는 점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의 바탕위에 만들어진다 라는 개념이 흔들리는 이 전세계적인 상황을 타파하려면, 진보주의자의 프레임으로 언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학교 급식 문제와 같은 주요 쟁점들에 대해 적절하게 정리해서 우리 상황에 적응할 필요하 있겠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한국 버전'이 필요하다. 주요 쟁점들의 구체적인 프레임을 짜고, 진보 지식인들이 보수에 대응하는 행동요강을 구체적으로 전파할 필요가 있다. 잘 디자인된 표지, 중도를 껴안을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작가의 이름으로 진정성 있는, 그리고 쉬운 언어로 된 책을 낼 필요성이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2009년 미국은 수십년간 보수층의 프레임이 미국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것에서 벗어나 진보적 프레임 전략이 먹히면서 탁월한 후보와 만나 진보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교육, 의료, 기술, 통신 등 가난한 사람들도 양질의 공적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가치. 우리의 가치를 정확한 프레임 안에 넣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차근 차근 이해시키는 일. 그런 종류의 일이다. 올바르게 말하고, 정직하게 말하고, 적절한 프레임이 우리들의 가치가 정직하게 수용되어 있고 그것을 영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와 정확하게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정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 최근 나온 <노유진의 생각해볼래?>를 함께 읽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프레임과 우리나라 진보세력의 핵심 가치는 그 맥을 같이한다.
** 이 글을 쓸 때까지 몰랐는데, 미국 공화당의 상징이 코끼리라고 한다. 그러니까 제목은 보수의 사고방식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상징성도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