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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2015 결산] 돌아서면 잊혀질 허무한 관계들 속을 헤엄치는 고독한 영혼

[도서]올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저/김영준 역
마음산책 | 2015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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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보먼은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후 하버드로 편입해 졸업 후 기자를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작은 출판사에 들어가서 판촉을 하다가 편집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사적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뉴욕에 놀러온 남부 출신의 비비안과 결혼하지만 짧게 끝난다. 이후, 약간의 연애를 하지만,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애매한 불륜놀이를 하다가 그도저도 배신과 복수로 끝나고 더는 가정을 꿈꾸지 않을 중년이 된 채로 다시 간간히 연애를 하는 인생을 큰 사건 없이 천천히 나른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소설 속에 붙박이 처럼 어떤 구조를 형성하지 못하고 등장해서 주인공이 되었다가 가지치듯 사라진다. 어떤 관계 때문에 인물이 새로 등장하면 그 사람의 배경, 결혼생활, 직업, 성격 같은 것들이 서너 페이지 정도에 걸쳐 기술되고, 그 사람과 관련된 또다른 인물, 그의 배우자, 부모, 친구 등과 같이 연결된 인물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다시 또 기술되는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가 흥미로운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등장하는 사람들의 굵직한 배경들을 기술하는 식이다.


보면의 아버지는 보먼이 태어난지 2년만에 가정을 떠났고 세 번 더 결혼했으며 결혼할 때마다 매번 더 부자와 결혼했다. 보먼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결혼한 여자가 죽었을 때 우연히 신문 기사를 보고 그의 아버지도 2년 전에 죽었음을 알게 된다. 보면의 어머니는 선생이었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비비안과 결혼한다고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 아들이 떠나는 것에 대해 막연한 상실감을 느낌과 동시에 대영지를 가진 며느리가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보먼의 첫번째 여자, 비비안은 남부의 땅부자집 딸이다.  아버지의 반대에 상관 없이 결혼을 하고 결혼 전엔 좋다며 섹스를 잘만 하다가, 결혼 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일상에 대해 별 노출이 없지만, 대략 뭔가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은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단지 그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병하러 외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이혼 요구를 하는 편지를 받고 보먼이 충격을 받고 슬퍼하는 내용으로 볼 때, 그가 어쩐지 조금 눈치 없는 인간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해볼 수가 있을 뿐이다. 보먼이 볼 때, 비비안의 이런 알 수 없는 행동은 <스토너>의 아내를 연상시키는데, 보면의 눈에, 그녀가 하는 일도 없으면서 책도 안읽고 그렇다고 집안 일에 열심인 것도 아닌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갸 볼 때 어질러진 집을 좀 치우면 좋겠다고 말하자, 자기의 인생은 그런 일보다 더 가치있다고 말하고, 그 말에 보먼은 그럼 '나의 인생은?'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으로 보아, 둘 사이에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과 생각의 갭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비비안을 사랑했다고 생각했고, 그 이별에 꽤나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독자는 비비안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말과 사냥과 그런 종류의 남부 상류층 라이프를 살다가 잠시 뉴욕이라는 도시의 화려함에 눈이 팔려, 작은 아파트에 살아보니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보먼이 비비안의 요구에 맞춰 자주 그녀의 친정 아버지, 친정 어머니를 보러 다니고 어울렸음에도 불구하고 클래스의 차이가 비비안에게 눈에 가시처럼 박혔을 수도 있다.


이후 런던에서 만난 유부녀는, 보먼이 그녀와 미래를 꿈꾸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편과 비공식적으로는 끝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하게 남편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보먼과도 흐지부지 사귀다가 다른 남자로 옮겨 탄다. 이후 보먼은 또다른 여자를 만나서 깊이 사랑을 하고 바닷가 시골 마을에 멋진 집도 함께 구입해서 미래를 설계하지만 여자의 배신으로 집도 빼앗기고, 또 한번의 깊은 상처를 받는데, 이후 그녀의 딸과 우연히 만나게 되자 어린 딸을 데리고 자고, 파리까지 여행갔다가 버리고 오는 방법으로 치사한 복수에 성공한다.

시대적 배경도 공간적 비?도 비슷한 <스토너>를 얼마전에 읽어서 자꾸 비교되고 겹쳐보였는데, 보먼은 <스토너>와 비슷한 듯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필립 보먼의 건조한 삶의 여정에는 뭔가가 빠진 듯 공허하다. 엄청나게 잘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맺으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지만 여자를 다루는 데 미숙하고 어떤 결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독자(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갈이 없다. 단지 그가 섹스까지 하는 여자들을 묘사하는 방법은 남자들이 흔히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어떤 기준 그러니까 예쁘고, 섹시하고, 다리가 길고 하는 것들만을 묘사하고 구체적인 갈등의 실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그리고 이 책이 주는 전반적인 공허함은 아마도 이런 것들일 것 같다. 피상적인 것들의 세계에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바깥쪽 세계에서만 맴도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 나오면, 호구조사 차원의 모든 정보들이 디테일하게 까발려지지만, 실제로 둘 사이에 어떤 긴장이나 갈등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못된 남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듯 보이지만, 자신 만만하게 믿고 있던 대상에게 갑작스레 배반당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자신을 채워거는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사적 맥락과 큰 관계없이 계속해서 나오지만, 그런 류의 소설이구나를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느긋하게 읽는 묘한 맛이 있었다. 얽히고 설킨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돌아서면 잊혀질 사람들과 하는 대화들, 섹스들. 우연과 필연이 교차된 시간들 속에서 짧막 ?막한 말뭉치들이 허공을 채우는 세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