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자밖 여운/교양

떠미는 곳에서, 떠나는 사람들

가끔 꿈을 꾸듯 떠남을 동경한다. 현실이 비루할 때, 발붙인 땅에서 풀 한 포기조차 자랄 수 없이 황폐하다고 느낄 때, 쳇바퀴처럼 늘 제자리인 이곳이 감옥처럼 답답할 때, 바다 건너 멀고 먼 반대쪽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위안이 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두려움과 불안을 이길 때, 이 정든 세계를 정녕 떨치고 떠나야할 만큼 현재와 미래가 절망적일 때, 가슴 터지도록 두려움과 설레임을 가득 안고 떠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떠난다. 열정을 걸고 청춘을 바쳐 이룩한 모든 것을 버리고 존재가 속한 세상 밖으로 사라져야만 한 줌 남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때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땅을 치고 통곡해도 변하지 않는 운명이 밖으로 떠밀어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우리는 떠난다. 내가 읽은 책들 속에서는, 누가 왜 어디를 떠났을까. 어딜 향해 떠났을까.  떠난 곳과 떠나온 곳의 그 맞닿을 수 없는 양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 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떠남과 그 이후를 그린 네 권의 소설을 골라보았다. 


 

검은 꽃

김영하

문학동네 2014.01.15

김영하의 <검은 꽃>에서 망국을 뒤로 하고 조선을 떠난 사람들의 디아스포라는 슬펐다. 끝내 돌아올 조국이 없었기에 슬펐다. 떠나던 자들에게 빈 곳간을 지키던 허울 뿐인 '제국'은 희망 없는 땅이었다. 군인들은 급료를 받지 못했고, 황족이 굴레가 된 가문은 끝내 목까지 차오르던 시퍼런 칼날의 위협을 견딜 수 없었다. 왕을 지키던 내시는 갈곳이 없어졌고, 순교를 강요받은 신부는 신분을 감추고 어디로든 떠나야 했다. 미풍처럼 불어오던 개화의 바람은 버려진 소년과 소녀들에게 미지의 땅을 향한 달뜬 경외와 희망을 불러왔다. 그리고 도둑과 무당 역관들, 제 땅에서는 스스로 버려졌다고 여긴 1033명이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머나먼 멕시코 땅이었다. 


소처럼 일하더라도, 먹고 살 한 조각의 내 땅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으면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희망 가득한 미래를 그리며 떠나는 배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질 채찍질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산허리를 돌아 계곡을 건너 그늘과 물소리 새소리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굴곡진 땅만 알고 있던 그들에게 뜨거운 태양을 가릴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은,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그대로 드러낸 황량한 멕시코의 땅은 얼마나 이질적이었을까.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지형, 공기, 언어, 관습, 문화, 먹거리들은 그들이 아무 필터 없이 맞닥쳐야 했던 당혹스런 현실이었을 것이다.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차가운 화물선 바닥에서 영역 싸움을 하는 짐승들처럼 자신의 몸 하나 누일 곳을 지키며 견뎌 찾아온 낯선 땅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그 이질감과 낯섬 뿐이었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텐가. 미지의 땅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실상 계약 노예임을 깨닫기까지는 도착한 후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흑인 노예들처럼 줄지어져서 팔려나갔고, 오로지 보잘 것 없는 까슬까슬한 옥수수 낱알로 만든 음식을 아주 조금 먹기 위해 온몸이 터지고 깨지고 피가 흐르고 진물이 나고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일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질적 세계가 먹고, 입고  내일을 소망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장미셸 게나시아 | 이세욱 옮김

문학동네 2015.04.15

장미쉘 게나쉬아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망명자들이 함께 체스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비스트로(식당) 안쪽의 폐쇄된 공간이다. 이상의 실현을 믿던 순박한 공산주의자들과 그들 편에 섰던 인민들에게 가해진 폭압과 폭정으로 얼룩진 배반이 ‘운 좋은’ 사람들에게 목숨대신 허락된 망명이었다. 법적 망명자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구차한 삶의 한 자락을 붙들고 분투할 때, 위안을 주는 것은 다른 세계에서 온 다르면서도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무겁게 누르고 굴러간 자국의 모양에 따라 저마다 다른 우연을 타고 다른 사상에 노출되고 다른 이념을 주입받고 다른 이유로 핍박받았지만, 결국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신분인 망명자가 된 것이다.


묵묵히 당에 충성하던 의사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숙청 대상이 되었고, 말린 생선 한 마리를 손에 쥐고 국경을 넘어 와서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쟁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파일러트는 사랑을 위해 친구를 배신했지만 끝내 혼자가 되어 공산주의자로 남아 있다. 헝가리의 국민오빠였던 남자 배우는 부다페스트의 민중이 공산당 독재 타도를 외칠 때 한 편이 되었다가 국경선을 넘어야 했고, 독일 출신의 레지스탕스였던 한 남자는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깨어난다. 체코의 한 외교관이자 최고 위치의 당 간부였던 사람은 줄을 잘못 선 대가로 숙청의 칼날을 피해 겨우 피해 달아났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뼛속까지 공산당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을 혐오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의 삶을 위해 떠나왔지만 그 이질적인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은 한 때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게 옳던 그르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 클럽에 열네 살 미쉘이 합류한다. 미쉘의 가족은 클럽속의 이질적 집단처럼, 또, 알제리 독립을 둘러싼 샤르트르와 카뮈의 양극단 지식인의 사상적 대립처럼 그 한 시대를 숱한 피를 뿌리며 양쪽으로 갈랐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샤르트르의 장례식은 한 시대의 멸망을 의미한다. 공산주의의 몰락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상반된 이념이 피로 서로를 찌르고 공격했던 그 아픈 역사가 아무 의미없이 공허하게 사그라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사진 속 숙청자들을 지워 없애던 사샤가 등장하며 그 없어진 공백, 있었지만 없어진 것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것들이 환기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문학동네 2015.10.03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떠밀려진 한 입양아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축복받지 못한 채 태어난 한부모 아기들은 어떤 사회적 힘에 의해 떠남이 강제된다. 이 땅은, 그리도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제 땅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키워낼 의사가 없는 땅인 것이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강제 입양이라는 불법적인 행동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땅인 것이다. 아이를 원하던 엄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막 태어난 아기의 의사와도 상관 없이 아기는 먼 곳, 자신과는 이질적인 생김새의 양부모 밑에서 양육되는 운명으로 버려진다. 아기는 커서 어른이 되었고, 떠난 것이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기에, 반대로 자신이 속한 그곳을 떠나 연어처럼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녀가 떠나온 곳은 그녀가 자란 곳이다. 자신을 키워준 이질적 생김새의 양부모를 견딜 수 없어 방황하던 기억과 그나마 의지하던 양모의 부재마저 견딜 수 없어서 떠나온 곳이 자신을 떠밀어 보낸 이 땅이다. 그녀의 떠남은 진정한 귀환일까 아니면 또 다른 떠남일까. 우연히 발견된 사진 한 장이 손 안에 주어졌을 때, 그 작은 단서 하나에 의지해 자신의 뿌리를 찾아온 한국은 양모의 욕심으로 감추어진 진실을 찾는 여정, 친모의 사랑을 정체성의 길잡이로 삼아 떠나는 여정이다.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2015.05.08

이제 현재의 우리를 보자. 나라없는 설움의 시대가 끝나고, 가난과 곤궁의 시대가 끝나고,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OECD라는 화려한 선진국 클럽에 가입한 지도 어언 20년. 더는 떠날 이유를 찾을 수 없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의 떠남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청춘들은 이곳에서 미래가 두렵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막막하다. 우리의 아이들은 한국이 싫다. 나는 이 책에 열광하는 더 젊은 목소리를 들었다. 기성세대인 내게 <한국이 싫어서>라고 말하는 아이들의 외침에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 나도 그렇다. 교육제도도 정치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을 찾기 힘든 요즘이지만 나는 내 땅에 누워 침을 뱉으며 그 침을 온 얼굴에 맞아야 하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정말로, 무슨 희망이 있나 싶기도 저주스럽기도 하지만, 저주하고 떠나서 도착할 그 곳이 설사 두렵지 않다 하더라도, 그 곳 역시 많은 이들의 실패와 절망과 패배를 필요로하는 또 다른 현실 속으로 몸을 낮추고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 떠남은 도피처가 된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내게 그렇게 읽혔다. 이 곳에서 싫은 일을 그 곳에서는 할 수 있다는, 이 곳에서 열심히 하지 않은 것들을 그곳에서는 열심히 할 수 있다는 믿음의 확산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끝도 알 수 없는 불신의 늪, 그것을 봉인하는 신기루에 불과한 이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동경이 이 피폐해진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이 떠나온 제물포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향수는 이루지 못할 상상이고 실현되지 않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과거로부터 쫓겨난 망명객들이다. <검은 꽃>에서 그 때, 그 모진 노예 생활을 끝낸 후, 운좋게 돈을 모아 해방된 고국, 반토막나고 다시 또 서로 적이 되어 싸웠던 모진 역사 속으로 저벅저벅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또다시 멕시코의 뜨거운 햇볕과 지평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갔을 지 모를 일이다. 그 숱한 피를 뿌리고 장렬하게 전사해간 공산주의라는 이상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구소련 땅에 망명객들은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이 두고 온 것, 그들이 목숨을 바쳐 이루었던 것은 이미 사샤가 지운 것만큼이나 아무 의미없는 '없었던'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카밀라가 돌아온 곳에 엄마가, 그리고 자신보다 어렸던 17세 엄마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 그 외롭던 정체성과 싸우던 사춘기의 시간들은 누구에게서 보상받을 건가. 이제 그녀의 삶은 어느 이질적인 곳에 발을 뻗을 것인가.  바라고 싶은 건,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이미' 떠난 젊은이들이, <한국이 싫어서>가 보여주지 않은 이질적이고 교활한 배반들의 속내와 피눈물겨운 적응의 과정이 한국에서 겪었을 난관과 좌절보다는 약하기를 하는 것이다. 


[YES24] 떠미는 곳에서, 떠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