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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실용

[신왕국] 근데, 영화 한 편 씹어먹어 봤니

전설에 의하면, 오래 전 공부를 잘 해 명문대에 간 학생들은 영어 사전을 한 장 한 장 찢어먹었다고 한다. 예전엔 사전이 미농지라고 아주 얇은 종이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깨알만한 글씨로 빼곡히 영단어의 목록이 한글로 된 뜻풀이와 함께 알파벳 순으로 수백 수천 페이지 이루어진 사전을 들고 다녔었는데,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는 사전을 자주 찾아라 라고 하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인이 배도록 들은 말 중의 하나였다. 어쩌다 한번 찾아보곤 대충 외우거나 어디 적어두곤 했던 그 사전을 전설 속의 선배(들)는 a 부터 깨알같이 꼼꼼히 외우며 몽땅 외운 쪽은 필요 없으니 찢어서 꼭꼭 씹어 먹었다는 것이다. 물과 함께 먹으면 먹을만 하댄다. 머리속으로 들어와 있는 지식을 배속으로 소화한다는 말이 퍽이나 인상깊었을 뿐만 아니라, 현상을 메타포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메타포를 현상으로 바꾸는 가역적 행위를 실행에 옮긴 전설의 선배들이 지닌 마음가짐이 실로 감탄스러웠더랬다. 


그 기억 때문인지, 씹어먹는 다는 표현이 어쩐지 메타포보다는, 긴 영화 필름을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는 어떤 동작이 연상되었지만, 물론 당연하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아니었다. 영화 한 편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키는 걸 말한다. 목적은 영어다. 표지 제목에 영어를 연상시키는 말이 안들어가 있으니, 필름을 씹어먹는 상상이 그리 억지도 아니다. 'wait a minute' 이라는 간단한 영어 조차도 '기다려 하나 둘' 이라는, 예전 심형래를 연상시키는 코미디 발번역으로 중학교 영어 선생님을 웃겨주시던 저자는 다니던 학교마저도 학교 폭력인지 뭔지에 연루되 퇴학당하고, 영화 씹어먹기 신공을 이용해 단 6개월만에 영어 귀가 트이는 신기루 같은 마술을 경험한다. 이후 갑작스레 자신의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더이상 학원에서는 배울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나, 커뮤니티 칼리지를 거쳐 UC 버클리에 입학하게 된다. 


꼭꼭 잘근잘근 씹고, 오도독 오도독 맛있게 씹고, 아작아작 빈틈없이 씹어 완전히 소화가 된 상태로 삼키는 것이 영화 씹어먹기 신공의 핵심 전략이다. 사실 내가 오랫동안 나나흰 클럽의 회원으로서 질적으로 차이가 큰 스펙트럼의 책을 받아보며, 책을 읽으라고 보내주는 고마운 것과 내키는 대로 리뷰 쓰는 거는 별개라,  출판사 서포터인지 안티인지 구분이 안갈만큼 야박한 별점과 혹평을 한 일이 간혹 있는데, 그게 대부분은 별 시답지 않은 경험으로 누굴 가르치려 들려는 종류의 책, 특히 빠르게 읽히는(내용이 없어서) 일본 번역서들이 그랬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 역시 빠르게 읽히고, 내용 역시 그렇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 이건 아들에게, 또 친구 아들에게 친구 딸에게 친척에게 두루두루 읽으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 자신에게도 추천한다. 이런 방식의 영어 습득 훈련이 비록 6개월만에 개과천선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가장 납득이 가는 방식으로, 충분히 반복적으로 말할 가치가 있는 반복적 설명과 더불어 영어 학습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리라는 것을 장담한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책을 사보라고 권한다. 우선 스토리텔링 면에서, 무식한 동네 깡패(를 연상시킴)에서 유창한 영어 스피커가 되기까지의 저자의 노력이 담겨있고, 영화를 잘근잘근 씹어먹는 자신만의 영어 학습 방법이 숨김없이 아낌없이 노출되어 있다. 라푼젤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나도 유튜브에서 라푼젤을 봤는데, 정말 초보자가 꼭꼭 알뜰하게 씹어먹기 좋은 맛이었다. 재미있는 영화, 발음이 정확한 어린이용 영화에서부터 시작해서 구간반복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 건데, 듣고 따라하는 게 아니라, 들으면서 같은 스피드로 같이 말할만큼 반복적으로 듣는다는 거다. 학습에 있어서 반복을 통한 암기는 고통스럽지만 영화에 빠지면, 어떤 상황에 이입하여 몰입하면서 동시에 외국어의 뜻을 파악하면 원어를 배우는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QR 코드로 연결된 동영상도 곳곳에 연결되어 있고, 추가적 교재도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을 수 있다. 동영상도 보았는데, 저자가 호감가는 인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