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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정문순] 한국문학의 거짓말

한국문학의 거짓말 - 10점
정문순 지음/작가와비평

체제 순응적인이라는 말은 자기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은 풀 수 있을 것도 같다. 예를 들어 왜 신경숙을 좋아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대개는 조용히 그러나 매우 은밀한 곳까지 그 내면을 끝까지 파고 해부하면서도 그 글이 따스하고 아늑하기 때문일 거라는 말에 대개의 독자들이 동의할 것 같다. 그것은 체제 순응적인 자신을 토닥 토닥 다독이기 때문이다. 괜찮아. 괜찮아. 그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보잘 것 없는 자신이, 용기 없는 자신이, 정의보다는 침묵을 선택하는 자신이, 저항보다는 순응을 선호하는 자신이 위안받는다. 그리고 잠시 읽는 동안에는 저 밑바닥 어디엔가 피 철철 흘리며 죽어간 어떤 희생들 위에서 부서질 듯 펼쳐진 우리들의 안락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된다. 


신경숙은 1980 년대의 민중가요, 정확하게는 민족 문학이 사람을 억압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런 1980 년대 문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그녀의 소설은 둥지를 틀고 있다. (p13)


‘생은 내 앞에서만은 더 이상 곡예를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286쪽)’와 ‘인생은 또 한번 나에게서 내 동생을 빼앗아갔다(286쪽)’라는 구절은 상당히 껄끄러운데, 왜냐하면 인생이나 ‘나’바깥에 있는 존재인 양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은 사람의 세상살이에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불행 같은 부류를 ‘생’이나 ‘인생’이란 용어와 동일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볼 때 한 개인의 인생이란 개인이 사회와 교서 파여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인데, 신경숙은 개인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바깥의 일을 ‘인생’의 의미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경숙 인물들의 자아를 허약성과 내면 풍경의 알맹이 없음을 보여주면 실례라고 하겠다 (p19 각주)


사실은 신경숙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잘 알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캐보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무지의 범주 속에 가두고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기로 한 것 같다. 이 책에 있는 1990년과 2000년 여성 문학에 대한 비평들을 읽어보니, 특히 그 중 조금은 읽어라도 본 신경숙 비평에 대한 글을 집중적으로 읽어보니. 내가 비록 정문숙 비평가처럼 구체적으로 쏙쏙 짚어내어 비판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1980년대 문학을 ‘억압’으로 간주하면서 알맹이 없이 공허한 문장으로 치장한 비판없는 순응성에 불편함을 느꼈었던 거다. 


신경숙의 글쓰기는 자신의 허약한 내면을 감당하지 못하고 상처를 내면화시킨 자가 현실을 견디도록 길들여지는 방편이다. 신경숙이 표절 의혹을 이기지 못한 것도 허약한 그녀의 내면이 밟아갈 수순이었다. 세계사적 전망을 상실해 버린 평자들이 고작 자신을 달래는 자기만족의 글을 쓰는 작가에게서 얼마나 많이 살아갈 희망을 얻었는지 의문이다. 상업성이 번뜩이는 신경숙을 포용하는 힘들다. 범상한 독자들과 진데 없이 세상을 깊이 고민 하려 하지 않고 살가움과 따뜻함을 덥썩 받아 들이는 범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32)


이제 표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자. 신경숙은 사과를 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은 의도적으로 베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기쁨을 아는 몸’ 관련 텍스트가 전국을 휩쓸던 때까지 나는 한 작가의 양심을 믿고 싶은 마음이 깊은 어디엔가 있었다. 필사하고 외우고 했던 우국의 문장들이 내면에 체화되었었을 수도 있어..


우국

전설

214

두사람의 뛰어난 미남미녀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가 나오게 마련이었다.

92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누구나 두 사람의 뛰어난 조화에 감탄의 소리를 내뱉게 된다

214

사람들은 자주 이 사진을 꺼내들어 바라보고는 이렇듯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남녀 결합이란 자칫. 불길한 것을 품더라고 한탄하였다.

93

그들은 두 남녀의 완벽한 조화를 바라보며 각자 인생을 뒷면에 생각해 보냈다 어떤 프라 이미 그들 사이에 끼어 들지 않을까 하는 그땐 저들이 저렇게 아름다운만큼 쓰라린 관통해 가는 자리 또 한 꼭 저렇게 뚫어 질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냈다

215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

95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

218

그 녀석들은 날 불러내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쉬는 중인 걸 생각 했던 거

96

내가 신혼이라 친구들은 내게 말도 없이 자원 했소


이렇게 눈앞에 가득 펼쳐진 빤한 진실을 보고도 문단은 입을 꽉 처닫고 있었다. 당시 이를 폭로한 박철화를 향해 신경숙은 ‘“위험천만한 단세포” “그리(표절했다고-인용자) 보자고 마음 먹은 사람” 운운하며 격한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거론할 의욕도 없”었지만 “독자에 대한 예의” 때문에 마지못해 응대했다는 말로써 입장 표명을 끝냈다(p31)’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표절 공방이 한겨레 ‘신문의 한 지면에서 외롭게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신문들과 문단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p31)’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사실 신경숙 표절 사건이나 1990년대 여성 문학의 비평에 관심이 잆어서가 아니었다. 제 2부 체제의 하수인이 된 문학에서는 탈주와 전복 내세운 순응과 패배의 찬가들이라는 이름으로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와 박진구의 <<수상한 식모들>>에 대한 비평이 실려있었고, 거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았겠다 싶었지만, 제 3부 그리고 부스러기들의 끄트머리에서 발견한 길잃은 한국 소설, 역사 없는 역사 소설 이라는 이름으로 게재된 <<칼의 노래>>, <<검은 꽃>>을 통해 돌아본 2004년 문단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싶어서였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생각해보니 사실 김훈도 그렇고 김영하도 그렇고, 입으로는 좋아한다고 광팬이라고 떠들었어도 막상 읽은 책은 김훈의 경우 칼의 노래 외 서너권 정도, 김영하의 경우 검은 꽃 외에 서너권 정도에 불과했다. 무늬도 뭐도 팬도 아니고, 그냥 읽은 책이 너무 좋아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 책만 잔뜩 모셔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숨막히게 아름답고 단호하고 단단하고 빈틈없는 문장들에게 어찌 ‘길잃은’ 혹은 ‘역사 없는’ 이라는 비판의 수식어를 들이댈 수 있나. 나는 그것이 의아했다. 


칼의 노래가 쓰여지기 전에 김훈은 말 실수 같은 걸 했는지 어떤 잘못된 행동을 했는지, 아무튼 그 세계에서(기자, 혹은 작가들 세계) 물러나 홀로 되었다. 작가는 칼의 노래에 대해, ‘반사회적 발언으로 물의를 빚다 침잠하던 시절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집필에 파고든 책이 이 소설로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충무공을 끌어왔으니 수긍할 수 없다’는 언짢은 반응을 빼고는 이 책을 혹평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역사가 아닌 자기 내면 속에 갇힌 사람의 폐쇄성, 무력한 개인의 합리화는 한 개인만 흠집을 내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자발적 동의로 귀결될 수 있다는 통찰을 이끌어낸다. 나는 조금 혼란스럽다. 나는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던 그 허무한 개인이 역사 속의 정의의 주체로서 행동하기 위해 적과 싸우는 충무공의 그 스산한 모습이 아직도 맘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순응과 충무공의 순응은 다르다. 라고 쓰고 다시 물러나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 팬심 때문에 김훈을 변론하고 있는가. 예술은 순응하면 안되나. 나는 어디에 순응하나. 나는 왜 순응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