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애덤 샌델의 소개가 눈길을 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아버지가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What's the right thing to do)에서 정의를 정의하는 일에 유독 국내에서 파란을 일으켰다면 아들은 이제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제목은 The place of prejudice. 아버지 샌델이 강의를 통한 문답식 교수법으로 유명세를 탄 덕도 책의 판매에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의 책이 갖는 주제가 불의가 만연한 한국적 상황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판매고에 나타난 점도 무시할 수 없는 팩트라 할 것이다. 이 책은 편견이란 것의 정체를 찾아가는 긴 철학적 이론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 칸트, 베이컨, 애덤 스미스,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깊고도 심오한 철학적 논쟁은 우리가 쉽게 무엇이 편견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너머의 본질적인 질문을 파고 든다. 아버지 샌델이 도덕 사고 실험과 논쟁을 통해 여러 시대를 통과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돌아보고 현대 일상 속의 정의를 반추했다면, 아들 샌델은 깊고 날카롭게 편견의 백그라운드적 이론을 파고든다.
우리가 쉽게 편견이란 말을 할 때에는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자신에게 미리 형성되어 있는 그 사람의 배경이나 학력, 피부색, 빈부, 외모, 직업 등의 가치를 인격에 혹은 행동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받는 현상을 떠올린다. 즉, 자신의 순수한 이성이 아닌, 관습, 배경, 도덕관 같은 것이 어떤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때,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으며, 소수와 개인을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는 부정적 편견을 깨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성공적 결과를 불러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번 형성된 가치관은 변하기 어렵다. 일단 한 번 믿기로 한 신뢰는 치명적 배신을 겪지 않는 한 앞으로도 전 인생을 통해 지속된다. 그런 것들을 배재시키기 위해 편견을 없애는 사회적 정치적 움직임은 과연 어디까지가 옳고 어디까지가 그를까.
외설 소송에 휘말린 예술가(메이플소프)를 판결하기 위한 배심원단에서 해당 미술관을 찾은 사람을 배재하는 것은 '예술의 자유'를 옹호하는 편견에서 비롯된 불공정한 판단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판사의 결정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선택일까? 편견을 피하기 위해 전혀 미술관 방문을 하지 않는 배심원들로 채우려 했던 판사의 행동이 편견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판사가 '편견'으로 판단한 미술관 방문이라는 행위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이다. 예술에 대한 배경적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 예술인지 무엇이 쓰레기인지를 안다. 작품의 안목을 가지는 것은 판사가 일컬은 '편견'과 관련된 행위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미술 작품에 대한 안목 없이 그것이 외설이냐 예술이냐를 판단할 수 없다. 그렇다면 편견이란 배경 지식일까
근대 초기와 계몽기에 나타난 편견에 대한 철학적 이론은, 비교적 이해하기가 편하다. 이 시대의 편견에 대한 철학적 이론은 편견이 곧 오류로 이어진다는 주장과 편견이 자유에도 반대된다는 의견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베이컨, 데카르트, 애덤 스미스, 칸트 이들은 제각기 다르 용어와 다른 해석을 통해 편견을 비판했다. 편견에 대한 반론이 처음 일어난 곳은 정치나 윤리 사상이 아니라 자연철학에서였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편견이 과학적, 철학적 오류를 낳는다고 보았다. '지식의 이상적 상태를 '빈 서판'이라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편견에 대한 반론을 전개한 베이컨은 인간이 지닌 앎은 편견 없는 견해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의지와 감정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인간은 상상의 지식을 만들어내고,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쉽게 믿어버린다고 생각했다. 반면 데카르트는 현상이 주관적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진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주관적 감정과 욕망이 객관적 사실을 은폐시킨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편견을 초월하는 것은 습관, 관습, 공통의 의견, 교육에 의해 형성된 견해 등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것들은 판단을 방해하는 일련의 우연적 영향력에 다름없다. 애덤 스미스는 한 발 더 나아가 도덕 판단에 이러한 사고를 적용하여 처한 삶의 환경으로 인해 무비파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고, 가족, 친구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고 했다. 스미스의 편견은 넓은 의미에서 이성에 앞서 주어지는 모든 판단의 원천을 말하고, 좁은 의미에서 한 사람이 처한 삶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습관, 관습, 교육, 공통의견 등의 영향을 말한다.
욕망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똑같이 자연의 우발적 사실로서 우리에게 덮쳐든다고 한 칸트는 편견을 진실 뿐만 아니라 자유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았다. 자유로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속한 공동체 의견이나 관습 교육의 영향에서 한걸음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본다면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이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편견의 극복과 계몽을 동일한 것으로 본 에드먼드 버크는 편견을 공공연하게 옹호한 철학자다. 버크의 편견 옹호는 봉건 사회의 관습과 양식, 도덕 감정에 대한 칭찬과 공리주의적 입장이다. 버크의 편견 옹호는 이성과 편견의 구분하는 기존의 입장을 수용하고, 그 가치를 뒤집은 것으로, 저자가 책에서 주장하려고 하는 '해석학적 편견 옹호'와는 차이가 있으며, 편견에 포함된 이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감정주의적 편견 옹호'라고 (저자는) 부르기로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편견의 해석학적 견해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철학을 수용한다. 따라서 책의 매우 많은 지면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이론인 '세계-내-세계(Being-in-the-World)와 현존재(Dasein), 던져진-던짐(thrown-projection) 등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는데, 철학적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가다머의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하이데거와 가다머에서 도출한 '정황적 이해'라는 개념은 관점, 상황과 편견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편견은 앎을 생산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주장하고 계몽기에 평가절하되었던 편견이라는 판단 원칙을 복권시킨다.
가다머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너무나도 어려워서, 중간에 많이 길을 잃고 읽다 말다를 반복했지만, 깊이있게 생각해볼만한 구절은 철철 흐르고 넘쳤다.
서구 전통에서 존재는 일반적으로 시간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있다는 것은 곧 항상 존재하는 것, 어떠한 변화도 허용하지 않는 항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지속적인 구성 부분들도 궁극적으로는 부서질 것이다. 인간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오늘이 곧 지나간 어제가 될 것이라는 자각, 지금 나의 행동이 곧 과거가 될 것이라는 인식은 인간 행동의 철저한 무용함, 생성이 갖는 주권성, 그리고 시간의 지배력과 탐욕스러움을 증명하는 듯하다.... 존재 자체가 곧 시간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전통적 존재 관념에 도전하는 것이었다(215)
현존재는 곧 자신의 과거라는 말은 현존재가 곧 자신이 속한 세계라는 말이다. 과거는 운명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돌이며, 존재의 필요한 구조다.(218)
과거가 현존재에 앞서있다(precede)는 말은 현존재가 과거 뒤에 질질 끌려다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가 현존재의 모든 혁신과 새로운 경험을 앞서 결정한다는 의미다.(219)
미래는 과거에 근거하고 있으며 과거도 미래에 근거를 두고 있다(220)
하이데거는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사건으로서의 죽음 개념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현존재는 매 순간 세계-내-존재로서 죽어가고 (그리고 삶으로 돌아오고) 있다.(223)
매 순간의 변화는 동일하고 단절된 의미 없는 무의 끊임 없는 반복이 될 것이다. 현존재가 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존재 구조가 변화를 통해 지속되기 때문이다. 세계-내-존재로, 던져진-던짐으로, 그리고 영원한 동시에 유한한 것으로 존재하는 과정에서 현존재는 죽음을 향하는 존재(being-toward-death, sein-zum-tode)가 된다(224)
죽음은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