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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카르린 파시히, 샤샤로보] 무계획의 철학

책의 저자 카르란 파시히와 사샤 로보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이 되면 그 일을 다시 그 다음 날로 미루는 사람들이다. 습관적인 미루기의 대가, 지연행동의 보고, 마감 날짜가 코앞에 닥쳐야 일을 시작하고,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지내면서도 일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탓한다. 우편물을 뜯어보지 않아,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다, 세금 독촉이나 카드 연체같은 중요한 우편물을 방치하여 때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무지막지한 손해를 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을 저자들은 LOBO(로보:Lifestyle Of Bad Organization)이라고 명명하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기 위해 책을 썼다. 


이들에게 미루는 습관은 불치병이며, 이를 고치기 위한 수많은 자기개발서들은 아무 효과가 없는 무용지물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할 일을 제 때 처리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과 우울과 불안이다. 저자들은 LOBO들의 행동 유형을 고쳐보겠다는 허울좋은 약속 대신, 즐겁게 LOBO로서 머무는 것으로부터의 이점을 알려준다. LOBO들은 단순히 편지를 이메일 답장을 하지 않는다던가 공공기관에서 보낸 편지를 뜯어보지 않는 것 같이, 재미없는 일들을 제때 하지 않은 죄로, 엄청난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앉게될 수 있다. 최소한 이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하는 생활 방식을 알려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LOBO로서의 삶이 가치있는 것이며,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들에 대해 설명한다. 


우선은, 그런 LOBO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지런하고, 잘 미루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제시간에 딱딱 해 없애는 성실한 사람들. LOBO들은 그들에게 꼼꼼한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짓고 있다. 하지만 LOBO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LOBO가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무계획적인 생활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의 경우 LOBO가 조용히 찾아와서 곁에 머무는 것이다(49)


맘잡고 시작한 책상 정리 중 발견한 책 한권이 청소를 미루게 하고, 일을 하다 부족한 자료가 있어서 찾아 들어간 인터넷 웹 페이지에 링크된 광고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빈다. 너무 많은 물건들과 너무 많은 인간관계, 너무 많은 자료들, 이렇게 모든 것이 과잉한 상태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집중은 가뜩이나 힘든데 타고난 LOBO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미루기, 지연, 자제력 부족과 충동조절 부족, 무계획, 그리고 죄책감은 같이 묶여 다닌다. LOBO들이 미루는 일들은 대개 강제되는 일들, 해야 되는 일들, 재미없는 일들다. 따라서 '미루는 사람에게는 원래 업무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힘이 충분히 매력적이다(89)'. LOBO들은 해야 할 본연의 업무들을 미루고, 다른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우리에게 어떤 업무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라도 시간은 제한적이다. 하이젠베르크는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것은 감지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즉,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것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결국 무엇을 선택할 지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루는 일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라는 임무가 주어졌을 때  일탈로 선택하는 B가 신발끈매기나 설겆이 청소 같은 경우에는 죄책감을 몰아내어 무언가를 했다는 밝고 긍정적인 기분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평생 설겆이와 청소와 신발끈만 매봤자 크게 도움될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A라는 임무대신 매우 흥미롭지만 매우 어려워보이는 B를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것이다. 


노련하게 미루는 프로들은 종종 훌륭한 업적을 남긴다. 리누스 토발즈는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를 개발하느라 전산학과를 졸업하는 데 8년이나 걸렸다. 아이작 뉴튼은 책을 읽느라 어머니가 시킨 농장 일을 게을리했다. 슈만은 전공인 법학 공부는 하지 않고 피아노만 쳤다. 다빈치는 궁정화가로서 맡은 업무를 제때 끝내지 못했다. 기하학이 더 흥미로왔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가 (칸 영화제 수상작인) 바톤핑크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밀러스크로싱 시나리오 작업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90)


미루기의 대가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완성하는 데 16년 걸렸다. 모나리자 최후의 미소라는 방점을 찍기 위해 걸린 시간이 16년이었다. 영감은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 불러 내거나 찾아내는게 아니다(109)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많은 자기개발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와는 달리 이들은 한 보험설계사의 말을 인용하여 서류(메모)는 과감히 버리라고 조언한다.  프로젝트에도 약육강식의 다윈주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머리 속의 아이디어를 모두 실행할 필요는 없다.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등장하는 강한 놈들만 선별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 된다.


LOBO의 반대편에 서서, 매 시간시간을 정확히 배분하여 계획하고 이행하는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동의되지 않겠지만, '일의 결과가 투자한 시간과 비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p127)'. 이들은 자신의 경험 뿐만 아니라 댄 애러일리와 같은 과학적 실험 결과와 여러 책의 인용을 통해 대드라인에 가까와져야 업무의 효용이 늘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마감일 바로 직전이 되어야 비로소 일이 손에 잡히고 생산성이 급격히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정말 맞는 말이다. 10일이 주어지면 8일 동안 거의 아무 진척도 없다가 2일남아야 20%가 진전되고 나머지 날 숨이 턱에 달해야 모든 에너지와 의지와 투지가 불태워진다. 즉, 작업에 투자하는 노력은 데드라인까지 남은 시간에 반비례한다. '데드라인에 가까워질수록 노동의지가 높아진다(p271)'.


창의력은 수도꼭지처럼 틀면 나오는 게 아니야. 상황이 돼야 한다고. 

어떤 상황?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패닉 상황  - <캘빈과 홉스> 271




여러가지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 하나를 예로 든다. 지연행동과 싸울 때는 자신의 주특기인 게으름을 이용한다. 집중을 방해하는 환경적 요소들을 제거한다. 5시간동안 공부하려면 책만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참그고 옷을 벗고 비닐에 꽁꽁 싸서 구석에 처박아둔다. 놀고 싶은 충동이 생기더라도 가지고 놀 것이 없고 옷도 입어야 하므로 주특기인 게으름이 도와줄 것이다. 



계획오류라는 용어가 나온다. 필요한 시간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미래에는 현재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희망찬 미래에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과제를 미루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실수라고 한다. 내가 사실은 챙피해서 마치 LOBO가 남의 얘기인 것처럼 썼지만, 리뷰를 쓰려니 고백을 해야겠다. 사실 이 책은 내게 너무 많은 공감을 주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데서 나오는 기쁨이 독서의 즐거움이 된 게 아니라 공감의 기쁨을 누린것이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저 지구 반대쪽에서 이런 책을 쓰고 있다는 안도감, 또한 그들이 연구한 바로는 지연 습관으로 곤란을 겪고 죄책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쌓여가는 주차 딱지와 세금 독촉장 보험금 납부와 청구 등을 생각만 하면 죄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쫄깃거려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루고 있는 나는, 책을 읽는 이유가 현실도피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결국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과 이런 보안 경고창에 100번  클릭을 해야 납부가 가능한 세금 납부와 같은 잡다구리한 일을 하기 싫어서라는 은밀한 음모를 나만이 향유하는 것이 아닌 LOBO들의 공통이라는 말을 읽으니, 스스로 LOBO임을 인정해야 하는건지, 그래도 이 책에 나와있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니 이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자부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밑줄

자기가 생각하는 시기보다 훨씬 일찍 포기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훨씬 의미있다... 실패한 프로젝트의 50퍼센트가 늦게 혹은 너무 늦게 중단되었다. 146


머리속에서 200개나 되는 생각이 동시에 튀어나오며 나야 나 내차례라고를 외친다면 잘 정돈된 책상이 무슨 소영이겠는가, 책상에 컴퓨터가 놓여 있고, 머리속보다 더 무질서한 인터넷이 손짓한다면 잘 정돈된 책상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156


(청소와 정리정돈을 미루는 사람들은) 물건을, 우리 살림살이에 둥지를 틀고 우리를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는 바이러스나 밈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불필요한 물건은 모든 생활전선에서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이다. 159


충동을 오랫동안 억제할수록 충동자제력이 약해졌다 230 (한정된 자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