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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프랜시스 크릭] 생명 그 자체, 40억년 전 어느날의 우연

생명 그 자체 - 10점
프랜시스 크릭 지음, 김명남 옮김, 이인식 해제/김영사

맞다. 그 프랜시스 크릭. 사슬 모양의 DNA 분자 구조를 발견해서 노벨상을 받은, 유전과 생물학의 관련된 책이라면 반드시 한번 이상씩 언급되는 그 크릭이 1981년 쓴 책인데, 주제에 조금 의아심을 갖게 된다. 놀랍게도, 수많은 20세기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도 대중들에게는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 중 하나인 크릭이 그 같이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론을 지지했다니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얼핏 듣기에는 이 엉뚱딴지같은 프란시스 크릭의 면모에 호기심이 일기도 한다. 정향범종설은 우주선을 타고 저 먼 곳에서 날아온 외계생명체에서 지구의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론이다.

수 세기가 지나도록 그가 짜놓은 판 위에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설명 가능하게 했던 뉴턴이 연금술에 빠져 지낸 것을 생각하면, 크릭의 정향범종설 역시 신비함에 빠져드는 과학자의 외도 쯤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는 책에서조차 정향범종설 자체가 `UFO, 사이비 종교, 그 밖의 여러 흔하고 한심한 우리 시대의 헛소리를 떠올리게` 한다고 직접 말할 뿐 아니라, 페이지 곳곳에서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관찰되었다는 UFO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그렇다면 무얼 주장하는 것일까.

내가 파악하기로 크릭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정향범종설 그 자체가 아니다. 지구 상의 생명 탄생 그 순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적기 때문에, 그 한 오라기도 안되는 근거를 가지고 몇 곂으로 두른 가설이 정설(원시스프)로 굳어져 있는 상황은 예를 들어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영원히 알아낼 수 없을 거라든가, 우주여행은 헛소리라든가 핵에너지 확용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성급하게 정설의 과학 기술에 의해 부정되어왔던, 하지만 후에 과학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은 사실들을 환기해볼 때, 과학이라는 것은 경직된 사고의 과학자들에 의해 종종 가능성 자체가 배제되어 오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므로, 그 무한한 가능성 중 단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원시스프에서 구아닌 아데닌 등등의 염기들이 생성되고, 사슬을 형성하고 착착 겹치고 접혀 단백질 분자들을 만들어 내서 그렇게 우연히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정설 대신 먼 우주의 발달된 문명이 보낸 생명의 씨앗에서 잉태되었다는 정향범종설이 그것과 비교했을 떄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가를 한 번 따져보자는 것이다.

따져보자는 것, 과학적으로, 확률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렇게 따져보고,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능성을 추후 과학이 근거를 수집하고 검증하도록 열어놓자는 거다. 그러다보니, 이 책이 사실 정향범종설을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생명의 잉태 그 근본적인 현상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티끌만큼의 그 단서와 대부분의 추론을 가지고 따져보고 생각해 보기 위해 과학적 근거들을 소환한다.

어디부터가 생명일까. 생명을 세포 단위에서 관찰하고, 그것 내부의 RNA 복제계가 탄생한 순간들을 상상하려면 그에 수반되는 유전학적 백그라운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크릭은 유전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공도 여러가지 했고, 그런 여러 지식들을 잘 통합하여 생명의 기원을 들여다보기 위핸 백그라운드 지식을 하나하나 해부하며 정향범종설과 원시스프설에 대한 가설을 각 생명의 진화 단계마다 대입하고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지구 초창기 원시스프에 포함된 화학물질들이 아미노산과 핵산 합성과 RNA 복제에 필요한 요소들을 자연발생적으로 생성해낼 수 있다는 실험을 유일한 근거로 가진 원시스프설이 어째서 의심없이 받아들여서는 안될 가설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대박 재밌었다.

크릭은 `실제로 생명 발생이라는 이 드물고 어려운 사건이 어떤 연못이나 웅덩이에서 실제로 벌어졌다`는 가설을 받아들였을 때, 그 바닷가 고인물이 해안선을 따라 1킬로미터 마다 있고, 그런 장소가 10만개쯤 있다고 가정하면고100년 안에 실제로 생명이 발생할 확률을 p로 놓았다. 그 p값은 10억분의 1이 될지 모를만큼 매우 낮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약 5억년쯤 있고 웅덩이가 10만개쯤 있으므로 이 경우라면 거의 틀림없이 생명이 시작되겠지만, 만약 이 p가 10억분의 1을 다시 10억으로 나눈 값(10^18분의 1)이라면 생명이 시작될 가능성은 50퍼센트가 되고, 만약 p가 앞의 값을 다시 1000으로 나눈 값(10^21분의 1)이라면 생명이 지구에서 시작될 가능성은 대단히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극한으로 치닫는 매우 드문 현상인 p값을 우리는 모르니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일어나야 했을 불가피한 사건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핵심은, 이렇게 드문 반응들의 연속이었을지 모를 사건에 대해 실험적 증거를 얻기는 어려울 거라는 것. (125쪽 내용 요약)

크릭이 `지지`한다는 정향범종설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으되, 가능성을 열어두었을 때, 우주상에 지구와 유사한 환경의 생성이 지구보다 먼저 태어나 고도 문명을 이룰 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1만년동안 우주로 비행해와서 지구에 생명의 씨앗을 뿌려놓았을 가능성 그런 우주선이 현재와 미래의 인류 기술로 어느만큼 가능할지에 대한 기술적 검토, 그리고 지구에 심어놓을 생명의 씨앗이 생명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가장 적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독자는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통찰을 발견한다.

우리는 과학을 학교에서 배운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이미 과학자들이 여러 근거를 끌어모으고 합의에 이끌어낸 결론이다. 그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사유했고 가설을 기반으로 검증했고, 토론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채택된 그 정설만을 과학 시간에 이것은 진실이야 그러니 믿어, 외워 하고 던져진다. 왜 그것이 진실인지, 그리고 또 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되는지 생각할 만한 여유도 없고 백그라운드도 너무 빈약하다. 크릭은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생명 그 탄생의 순간을 의심했다. 어쨌든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지금(1981년)까지 밝혀진 지식을 모두 숙지한 사람으로서 생명의 발생은 충족 조건이 너무 많기 때문에 기적이나 다름없어 보이고 또한 그토록 오래전에 발생했거나 혹은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을 파헤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나 상상력이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어서, 그러면 우주의 다른 곳에는 생명이 발생하기에 더 유리혼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력을 펼쳐보인 것이며, 그 상상력은 어떤 의미에서볼 때 원시스프의 몇 개원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명의 복사계가 만들어졌다는 것만큼 비슷한 수준의 추론적 근거가 제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핵생물이든 진핵생물이든, 저자가 강력한 후보로 내세우는 녹조류의 세균들이건  생명의 그 작은 시작이 지구에서 발생된 게 아니라 머나먼 우주에서 날아와 퐁당 빠진 그 연못에서 만들어진 생명체 위에서 진화를 시작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마저도 생명은 신비하다. 아니,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시점에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은 화석 근거가 주어지더라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다면 채워내지 못할 역사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