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곁에 두고 읽는 서양철학사 - ![]() 오가와 히토시 지음, 황소연 옮김, 김인곤 감수/다산에듀 |
철학이라는 글자를 보면 휴 하고 한숨부터 나온다. 외면하자니 미술책을 읽어도 건축책을 읽어도 역사책을 읽어도 항상 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무슨무슨주의니 무슨 사상이니 하는 것들이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닌다. 과연 철학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되는, 몸속에서는 절대로 합성해내지는 못하지만 성장과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처럼 내면의 성장과 지적 발전을 위해 단단하게 기둥처럼 지탱해줄 필수 지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입문서들을 하나씩 읽어보지만, 많은 시간을 바쳐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결실들은 아주 잠시 그러니까 읽는 동안에만 머물다가 작별 인사도 없이 그렇게 떠나보낸다. 이처럼 읽고 남겨지는 대비 가성비가 가장 안좋은 분야가 철학이다.
이번에는 곁에 두고 읽는 서양철학사를 펼쳤다. 일본인인 오가와 히토시라는 철학박사가 지은 책인데, 일어 원제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 곁에 두고 읽는 서양철학사인지 국내 제목에만 '곁에 두고 읽는'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 제목은 History of Philosophy 이다. 철학의 어원은 그리스어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와 사랑한다를 뜻하는 필로가 합쳐진 말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하여, 직접적으로는 지혜를 사랑하는 말이고, 이것을 '끊임없이 앎을 추구하는 과정이 마침내 철학으로' 이어졌다고 서장에서 밝히고 있는데, 한자어로 찾아보니 철학의 밝을 철(哲)은 밝다, 슬기롭다, 알다, 결단하다로 배울학자와 함께 학문이 되어 '인간이나 인생 세계의 지혜 궁극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어 있다(네이버 한자사전). 한자어와 영어 모두 비약이 있긴 하지만, 철학이란 세상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왜 어려울까. 책을 읽으면서 어려운 이유 하나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철학자들이 자기 말고는 못알아들을 개똥같은 헛소리들을 늘어놓아서가 아니라, 앎을 추구하는 과정중에서 정의한 언어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습득될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일상에서 쓰고 있더라도, 그 철학적 학문적 원뜻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철학자마다 모두 다르게 제시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즉, 언어의 쓰임새가 달라졌거나, 일반인과는 유리된 불통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현상일 수 있는 거다.
몇 달 전 샌들 교수의 아들 샌들이 지은 책 <<편견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수도 없이 읽었던 '세계-내-존재'와 '현존재',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저런 글을 쓸 때 밥먹듯 그 뜻도 잘 모르고 써먹는 '실존'이라는 말과 샤르트르가 정의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 삶을 강조한 철학으로서의 실존주의,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실존과 이 실존의 세 가지 단계인 1. 미적 실존(행동이나 선택의 근거가 감각적 쾌락에 머무르는 단계), 2. 윤리적 실존( 고매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 윤리적 인간상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것)과 3. 종계적 실존(자기 부정을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침),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신이라는 존재에 삶을 맡기는 인간을 비판하고 그리스도교를 노예 도덕이라 부른 니체의 노예 도덕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만나는 니힐리즘(허무주의)과 노예 도덕에 기대지 않고 영원 회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인 우버멘쉬 등의 언어를 만나면 우리가 그냥 생각 없이 어렴풋하게 쓰는 실존이라는 뜻이 더이상 철학적 실존과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긴다. 결국 어렴풋이 철학이 이야기하는 삶의 근원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떤 철학자들이 어떻게 탐구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가, 역사 속에서 건축이, 음악이, 미술이, 정치와 사회 제도와 현상들이 어떻게 함께 동반된 변화를 겪어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고, 그 대답은 현재도 모르며, 현재 역시 역사의 일부이고 변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 책의 내용과는 크게 관계없이, 책을 읽으면서 글자는 글자대로 읽고, 생각은 생각대로 했던 내용을 또다시 생각내는 대로 주절주절 적어본 것인데, 책은 유사한 서양 철학자들을 고대부터 6개 챕터에 걸쳐 약 50여명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사상들을 잘 정리된 표와 그림과 여러가지 인포그래픽스를 곁들여 편집했고, 그 내용도 가급적 쉽게 설명하려고 애쓴 노력이 잘 보인다. 그런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려고 하는 책들의 특징은 잘 보면 쉬운 내용은 단원의 들어가는 말에 환기용으로 쓰여 뭔가 좋은 내용이 있을 것 같은 기대를 주지만 사실은 별로 하나마나한 소리들이 많아 조금 쓸모가 없고, 핵심 내용은 역시나 압축되어 있기에 이해하는 게 호락호락 쉽지만은 않다. 책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어려운 걸 쉽게 쓰려면 비약이 생기기 때문에 어려운 내용은 어렵게 이해해야 하며, 어려운 내용은 쉬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50여명의 철학자라고 하면,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쟁쟁한 사람들의 사상을 백과사전식으로 찾아볼 수 있고, 그래서 곁에 두었다가 예를 들어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정의한 '랑그'니 '파롤'이니 하는 개념과 거기에서 파생된 랑가주라는 언어활동에 대한 개념적 주석 없이 멋대로 마구 쓰여진 책들을 읽을 때, 위키백과 보다는 신뢰성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참고도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서 자체에서 그렇게 제공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성에 포함된 장별 연대기 속의 철학자들과 해당 철학자들의 소개, 그리고 시대와 사상을 고려해서 장을 나눈것들, 철학자 뿐만 아니라 시대를 대표했던 언어학자 심리학자 등을 적절히 배치한 점, 그리고 가장 유용한 정보로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과 용어를 그림으로 표현한 점 등을 높이 평가한다.
95(베이컨, 베이컨은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로, 실험과 관찰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학문인 귀납법을 탄생시켰다. )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고정관념을 이돌라(idola)즉 우상이라고 표현하며 인간의 이성이 빠지기 쉬운 우상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번째 우상은 종족의 우상이다.... 본성에 기인하는 우상으로 인간의 감정이나 감각이 그릇된 판단을 초래할 수 있다... 두번째는 동굴의 우상이다.좁은 동굴에 생각이 갇혀 버리듯이 개인의 편협한 성향이 초래하는 편견을 이른다. 자신이 받아온 교육 영향을 받은 인물, 읽은 책 등이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아다. 세번째는 시장의 우상이다. 이는 언어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인간은 언어에 더없이 약한 존재다. 그래서 시장에서 전해들은 소문을 진실로 믿어버릴 때가 많다... 네번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이는 권이나 전통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데서 생겨나는 선입견이다.
143(피헤테)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이 누구인지 끄집어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발아볼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다. 이를 '비아'라고 부른다... '자아는 나눌 수 있는 자아에게 나눌 수 있는 비아를 반정립한다.
165 (쇼펜하우어)
예술은 인간으로부터 주관 혹은 객관이라는 요소를 제거해 주고, 의지와 욕망에서 비롯된 모든 고통에서 인간이 해방되도록 이끌어준다. ... 문제는 에술을 통한 해탈이 아주 짧은 일시적인 해방이라는 사실이다... 도덕을통한 해탈...은 타인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의지, 생을 향한 의지를 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단념하고, 도덕을 통해 금욕적으로 의지를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궁극적인 처방전이다.
179(니체)
모든 일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마음에 따라 생기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니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남 탓을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노예 도덕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인 이상, 그 허구를 받아들여야 한다.(p179)
185(베르그송)
'엘랑 비탈(elan vital)'은 생명의 비약이라는 의미다. 즉, 생명은 결코 일원화된 진화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폭발적으로 분산됨으로써 비약적으로 진화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