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면 멀리 바람이 실어온 너의 슬픔이 느껴질 때가 있다. 너의 절망과 너의 상실과 너의 분노와 그 모든 것을 안고 이대로 시간이 데려다 주는 곳을 향해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 너에게 나는 애초에 우리가 완벽한 무였던 것처럼 무능하다. 단단하게 닫아 걸어 채운 너의 문 앞에서 서성이지만, 너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은 단지 서울과 지방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씻기지 않을 슬픔을 견디는 상처난 너의 모습을 확인하려는 제스처가 되는 것이 두려워 그저 시간에게만 너를 맡겨둔다. 그러나 안다. 시간이 고통을 씻어가진 않을 거란 걸.
10년전, 20년전 내가 힘들 때를 돌아본다. 21세기, 여전히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은 버거웠다. 이 일과 저 일, 직장과 육아와 가사 사이에서 어느 하나에 온전히 나를 몰입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 시간을 나누고 노동력을 쪼개고 정신을 분산시키고 애정을 분배했지만 여러 덩어리의 실패들만 차곡차곡 내 인생의 나이테를 채워갈 뿐이라고 느꼈던 시절이었다. 입원중인 엄마의 병실 환자 침대에서 읽은 책 한 권이 나 자신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계기를 주었다. 대단한 책은 아니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해 위험한 봉사라는 행위에 자신을 맡기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내용이었는데, 매일 매일 만나는 삶의 모퉁이에서 지쳐가고 있던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그 책이 결정장애에 부딪혀 육아냐 경력이냐 가정이냐라는 선택을 미루고 어느 것 하나도 내려놓지 못한 채 그 몽땅을 끌어안고 침몰하는 방향으로 배를 몰던 상황을 단칼에 정리해 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내가 사적 고통에만 연연해있는 동안 공적 고통에 시선을 돌려, 삶을 던지고 그로 인해 행복을 찾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한 순환이었던 생각의 경로가 극적으로 선로를 바꿀 여지를 준 것이다. 이런 경험이 네게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네게 건네는 책 한권이 어두운 너의 동굴을 비추어 네가 더듬고 세상 밖으로 나와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하는 바란다.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책들을 사 모았다. 서점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마치 우리 세대에는 위로받는 일만이 독서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일은 위로가 전부인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혀에서만 머물다 사라지는 달콤한 사탕일 뿐이다. 몇 시간 후면 소변으로 배출될 진통제 같은 것들이다. 그렇게 사들인 책들을 읽으며 너의 절대적 슬픔을 감각적으로 소비하는 자신을 보았다. 네게 보내려고 모아둔 그 책들을 한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오래 전 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삶에서 선택은 항상 무섭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하나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므로, 거기에는 훼복될 수 없는 자아의 손상이 뒤따르기도 했다. 나는 나의 결정을 패배로 인식했다. 당시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했지. “너 이 결혼 끝낼거니? 무슨 대단한 영화를 누리겠다고..” 나는 그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대단한 영화가 아니었다는 건 세계가 안다. 역사가 안다. 남자의 노동력에 무임승차한 후 가정이라는 고립되고 안정된 공간에 자신을 가두고 쓸고 닦고 가꾸는 것의 노동 가치를 애써 주장하는 구차함을 네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이 너를 내게 연결시켰다.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종속이라는 두려움과 맞설 자신이 없었다. 우리의 꿈은 하급 공무원을 꿈꾸는 똑똑한 청년들의 꿈만큼이나 소박했던 거잖아. 둘 중 하나가 무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이 여성인 세상이므로 순순히 물러난 것이 아니라, 이제껏 버텨왔음을, 그 숱한 실패 뭉치들을 안고 웃으며 내려가는 길 위에서 한없이 눈물흘렸음을 네가 알고 있음을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분투하는 여성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여성임을 사랑한다. 굴곡진 역사에서 아직도 편견과 불합리와 자주 부딪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여성을 남성과 바꾸길 원하지 않는다. 여성의 여성적인 부분은 그 존재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것임을 특별히 느끼게 한 책이 있다. 올해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2차 대전 중 구소련의 대독 참전 소녀 병사들의 육성을 담은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남성들의 영역’에 가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여성성을 버리지 않았다. 피가 튀고, 내장이 늘어져있고, 잘리워진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그 참혹한 전장에서도, 수도 없는 죽음을 묵도하고 끔찍한 장면을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감내하면서도, 병사들은 자신의 여성성을 몰래몰래 꺼내보았고, 예쁜 것들에 매료되었다. 전우의 시체로 가득찬 이른 봄볕 아래 한줄기 민들레 꽃을 보기 위해 너덜너덜 다친 몸을 일으켜 세워 창 밖을 바라보았고, 고양이 한 마리에 감동했다. 귀고리를 숨겨두고 몰래몰래 한번씩 끼어보고, 내일 전투에서 죽을 것을 예감하고는 줄기차게 새 속옷을 요구하였다. 죽는 것보다 포탄에 몸이 갈갈이 찣겨 남겨지는 죽음 후의 ‘모습’이 더 두려운 여성들이었다. 갈아입지 못한 속옷을 입고 죽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은 여성들이었다. 온 몸으로 지킨 조국이, 너덜너덜 상한 몸을 이고 지고 끌고 돌아온 고향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읽어나가다 보면 분노가 서서히 자각으로 바뀐다.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에 등장하는 여성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의 역사다. 19세기 세계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뜨겁게 불타오를 때, 그 불구덩이 역사 속을 통과하던 자리가 배경이다. 혁명으로 이룩해낸 피의 댓가로 탄생한 새 공화정에 대통령으로 앉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왕정으로 복고한 때다. 억압과 착취의에 대한 자각이 들풀처럼 번질 때, 탄광 노동자의 깊숙한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 에밀 졸라는 개미집처럼 복잡한 깊고 어둡고 습한 탄광 속 그들의 삶과 사랑과 분노와 체념과 실패와 희망을 적나라하게 캐어내었다. 탄광 깊은 곳에서 몸이 바스라질 때까지 석탄을 캐던 노동 현장에 대한 묘사는 인류 기록 유산에 가깝다. 닭장처럼 좁은 연립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들의 거처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아귀다툼으로 가정과 이웃의 일상이 묘사되는 그곳에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숭고한 노동자들의 거룩한 이상은 없다. 하숙생을 포함한 온 가족이 한 방에서 함께 지내며, 사생활 없이 노출된 아이들의 어른 흉내내기 놀이는 그 아이들이 본 모든 것의 모방이다, 탄압과 착취, 섹스와 욕설 폭력, 속임수 등 모든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의 놀이는 그대로 담아낸다. 아직 발육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들은 시커먼 공터의 으슥한 곳에서 힘센 남자들게 유린당하고 아이가 아이를 가지면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 아빠가 되었어도 작은 하루 일당으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아이들은 분가하지 못하고, 석탄 가루가 날라다니는 공터와 숲에서 섹스를 한다. 이 때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 훨씬 적은 댓가를 받았으며 돌아와서 밥을 차렸다. 애정 관계는 종속적이었으며, 자주 폭력적 섹스가 동반된다. 에밀 졸라는 이 극한의 노동현장에서 더욱 핍박받는 여성들의 삶을 세밀하게 조명하였다.
세 번째로 수컷의 세계가 다루는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남성들의 시각을 관찰할 수 있는 소설 하나를 추가한다. 성석제의 소설 <왕을 찾아서>다. 왕은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을 말한다. 건달들이다. 소설 내에서 세희는 예쁘고 매력적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환상을 충족시키는 여자란 예쁜 여자다. 지역 내 권력 다툼을 왕위 쟁탈전이라는 시각에서 봤을 때, 세희는 그냥 왕의 여자다. 세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누가 왕이 되든 왕이 세희를 갖는다. 공작새처럼 활짝 펼쳐 보일 화려한 날개가 없는 수컷 사람들은 권력으로 최고의 암컷 사람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세희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는 전리품에 가깝다. 세희의 생각은 단편적이고, 단지 뜻을 잘 알 수 없는 몇 마디 대사가 그녀를 암시하는 전부다. 그 몇 안되는 대사 중에는 왜 먼저 자자고 하지 않았냐고 왜 나를 그냥 보냈냐고 왜 노래만 부르고 있었냐고 항변하는 대사가 있다. 이 유치한 유행가 가사 같은 세희의 말에는 남자들의 환상 을 지배하는 최고 매력의 여성은 이처럼 종속성과 수동성을 전제로 한다. 좋다. 그것은 그들만의 환상이므로 그건 그들의 문제다. 우리들의 문제는 그들의 환상에 휘둘리지 않음에 있다. 물론 그러한 세희의 유행가 같은 대사는 화자의 못난 망설임으로 비롯된 사랑의 미완성이라는 은밀한 신화를 완성하는 장치이지만, 우리는 남성이 바라는 여성상과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여성을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닫힌 너의 문 바깥쪽에 서성이다, 바람을 타고 전해져오는 너의 싸늘한 망실감에 추위를 느낀다. 문틈 새로 빠져 나온 너의 거대한 슬픔이 광자들의 움직임을 타고 아련히 전해질 때 떠난 아이의 흔적을 훑는다, 혹독한 추위 속 너만의 동굴에서 홀로 버티고 있을 너의 그림자가 아른거려 눈시울에 젖는다. 대의를 위해 분투하는 여성의 삶, 들끓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여성들, 남성의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인형같은 여성들. 그 속에서 너와 내가 이제껏 살아내온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시간의 모퉁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1세기만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완전한 분자와 원자들로 세상 속에 섞이겠지만, 이 티끌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많은 생들은 계속되고 있음을 생각하자. 박스에 책들을 담는다. 내 마음 한 자락이 너에게로 가 닿기를, 그리하여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진 너의 마음을 조금 녹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YES24] 닫아 채운 너의 문 앞에서 서성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