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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사라져가는 도시, 계속되는 삶

[eBook]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저/윤희기 역
열린책들 | 2014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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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책이 잘 안읽힐 땐, 접고 다른 책을 본다. 이것 저것 다 손에 안잡히고 집중이 안될 때 가장 책에 빨려들게 하는 작가가 폴 오스터다. 장르 소설이 아닌데도 작은 긴장감이 흐르고, 현대 소설인데도 대체 인물들은 뭔 생각이래 하고 답답하게 하는 법 없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대가임에도 대중소설적인 인간 관계들이 쩔그렁 거리며 내는 소란들이 있고, 도시적인 은은하고 세련된 문체로 늘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매번 그의 소설들은 새롭다. 완전히 새로운 주제, 새로운 시도, 화법의 변화가 있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뭐 폴 오스터의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데, 사실 몇 개 안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개 읽자 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몇개만 읽어도 그 사람을 많이 읽은 편이 된다. 


얼핏 생각하면 1984를 떠올리게 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의 세계를 다룬다. 모든 것이 사라져 내리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는 이 도시는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을 염두에 두고 상상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곳은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안나 볼룸은 오빠를 찾으러 떠난다.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는 곳이라면 누가 왜 갇힐 것을 무릅쓰고 떠날까. 가는 배가 있으니 오는 배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항구는 곧 봉쇄되고, 국경은 멀다. 알고 있는 것은 단지, 현재 오늘이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열악하지만, 그 하루가 지나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진다는 것 뿐이다. 옛날이 아무리 나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오늘날의 그 어떤 것보다 낫다는 믿음은 이 도시에서 단단하고 유일한 믿음이다. 죽음에 이르기 위하여 죽음의 질주자, 최후의 점프, 안락사 클리닉, 암살 클럽 등의 클럽들과 서비스 상품이 난무하는 곳, 도시 거주자의 반이 갈 곳 없는 노숙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고, 어디를 가든 시체가 널려있는 곳. 그 시체에서 옷이며 소지품이며 금니까지 수집해 가는 사람들 틈에서 안나는 살아간다. 



이렇게 얘기하자. 우리 모두가 괴물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내면에 옛 삶의 흔적을 지니지 앟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아마도 이게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은 다 끝나고 없다. 하지만 그 옛 삶을 대신해 들어선 삶이 어떤 삶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옛날을 회상할 수 있는 사람들ㅇ게는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게 엄청난 고통이다.... 가장 일상적인 일에 맞닥뜨려도 어덯게 행동해야 할 지를 모른다. 행동을 할 수 없기에 사고 능력도 없어졌다. .. 주변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변활ㄹ 거듭하면서 매일 새로운 변동을 낳는다. 예전에 그 흔들림없이 존재했던 가정이나 전제가 한순간에 헛된 것,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오빠를 찾으러 갔지만, 오빠를 찾을 만한 단서는 전혀 찾지도 못한채, 그녀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는다. 노숙을 하며, 넝마주이로 살아가다가 노인을 도와 그 집에 들어가서 숙식을 함께하지만, 노인 부부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신세가 되고, 그러다가 그들이 죽어 집에서 내쫓긴다. 그러다가 우연히 오빠의 소식을 알지도 모른다고 이름을 적어간 사뮤엘 파르라는 기자를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져  그가 묵고 있던 도서관에서 함께 지낸다. 그러나 그 도시는 너무나도 위험한 무법 천지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더이상 아기가 생기지 않는 도시에서 그들에게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생명이 싹텄는데, 신발을 구하러 나갔다가 공격을 받아 그 짧은 행복은 종말을 맞는다. 크게 다친 그녀는 우연히 쉼터의 순찰대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그곳에서 노숙자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또한 그곳 운영자인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쉼터 워번하우스는 예전에 있던 재산들과 골동품들 및 귀금속 등을 팔아서 노숙인들에게 단 몇일만이라도 깨끗한 옷과 따스한 음식, 편안한 침구와 온수가 나오는 목욕 시설등을 제공한다.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노숙인들이 단 몇일이라도 그러한 혜택을 누리고 힘을 얻기 위해 쉼터 앞에서 길게 줄을 서있는다. 거기서 노숙인들을 면담하는 일을 맡은 그녀는 사뮤엘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역시 앙상한 뼈만 남은 채로 거의 죽다 살아남았다. 마침 워번하우스에 젊은 남자가 필요했던 빅토리아는 안나가 자신을 배신하고 사뮤엘과 함께 사는 문제에 개의치 않고 사뮤엘을 쉼터 운영에 의사 역할로 끌어들인다. 이 때 이미 워번하우스는 모든 재산을 다 소진해서, 남은 것이 없어 문을 닫을 위기에 있었다. 어쨌든 가구와 건물 기둥마저 뜯어내어 난방을 하며 추운 겨울을 난 그들은 국경을 넘기로 모의하는데, 안나는 어렵게 발견한 오래된 빈노트와 연필을 손에 쥐게 되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이 소설은 안나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이 그곳에 오게된 경위와, 그 이전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약간의 설명적 회상을 덧붙여 써내려간 이야기다. 


줄거리를 길게 쓸 작정이 아니었는데, 세 줄만 쓰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사실 줄거리 자체 보다는, 소설의 문체가 내뿜는 그 폐혀의 분위기다. 그곳의 섬뜩한 풍경들, 더이상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고, 점점 부서져내리기마 하는 어느 도시에 사람들이 갇혀 있을 때, 그 절망적 아비규환 속에서도 여전히 체제는 계속되고 있고, 억압과 강제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모습의 풍경들을 만져질듯 실제같이 묘사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가. 어떤 것, 왜 이런 완전한 가상의 폐허의 도시가 어쩐지 익숙한가. 어느 외진 곳의 똑같은 풍경이 실제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절묘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그 희망없는 땅, 나날이 더 나쁜 일만 기다리고 있는 무너져내리는 공간에서도 삶은, 사랑과 헌신은, 미움과 폭력 못지 않게 계속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