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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교양

종이달

거액의 공금 횡령을 하고 태국으로 도주해 쫓기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리카는 어쩌다 자신이 그렇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한다. 만일 그때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만일 그 때 아이가 생겼더라면, 만일 그 때, 고객의 집에서 고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시작된 만일 그 때는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 은행에 근무하게 된 전문대 진학과, 4년제 대학 대신 전문대를 가야만 했던 가정의 급작스런 쇠퇴에까지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과연 그럴까. 만일 그 때 그 작은 어떤 계기 하나가 점점 일을 확대해서 거금의 공금을 횡령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면 어떤 환경에 처해 있었더라도 인간은 똑같은 삶에 이르게 되는 걸까.

리카가 회상하는 이야기는 여러 사회적인 이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범죄자다. 엄청난 돈을 횡령했다. 10억정도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리카를 설명하기 위해, 그녀의 지인 세 명이 리카의 이야기와는 별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등장하는데, 그들 모두 리카를 악인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예쁘고 착하고 정의감 넘치는 의인으로 그려진다. 그렇다. 리카가 '만일..'에서 회상하는 가장 처음의 횡령은 다른 사람을 위해 시작되었다. 그 다른 사람은 다름 아닌 대학생 내연남이자 고객의 손자다. 돈이 차고 넘쳐나서 은행에서 나온 방문 영업사원이 허드렛일까지 마다않는 수전노 노인 고객의 손자다. 그녀는 그 노인 고객의 돈을 횡령해서 손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준다. 그 맨 처음의 범죄를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영업실적이 좋으니 갚을 능력이 있었고, 곧 갚을 거였다. 범죄고 무엇이고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에는 일단 한 번 발을 들여놓는 일이 힘든 것이지, 발을 한 번 담거본 이후에는 그것을 멈출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한 번만 행사한 배우자는 없고, 섹스를 단 한 번만 하고 마는 연인은 없지 않은가. 한 번 하면 계속하게 되는 것. 그것이 남의 돈을 허락 없이 '빌려' 쓰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고, 거짓말을 하는 일이다. 

학창시절 리카의 선하고 의로운 면모를 기억하는 유코, 요리학원에서 만나 자주 만나며 리카와 좋은 관계를 가졌던 아키, 한 때 리카와 사귀었던 적이 있던 가즈키 이들 모두 리카의 횡령 소식을 뉴스로 접한다. 10억이라는 큰 돈을 어디에 썼을까. 우리나라라고 해도 그런 사건이 생기면 으레이 남자 꽃뱀에게 사기당했을 거라고 추측하기 쉽다.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매체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사생활에 남자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 추측은 맞다. 적어도 객관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리카의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본 이 책은 그녀가 남자꽃뱀이나 사기꾼에 의해 놀아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삶이 어느날을 경계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선회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리카는 남편과 피상적으로는 잘 지내고 있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봐주고, 리카의 늦은 귀가도 이해해준다. 그러나 아이를 갖고 싶어, 거사를 위해 나름 준비한 리코에게 남편은 잠자리를 거절하고 정숙하지 못한 여자 취급을 한다. 이 때의 시대 배경이 1990년대라고 해도, 단지 보수적인 남자라고 볼 수만은 없는 폭력적 억압이 존재한다. 어째서, 여자의 욕망은 단정치 못한 것이 될까. 게다가 남편은 여자가 다니는 직장이 아르바이트에서 계약직일 뿐이라는 점, 버는 돈이 자신에 비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교묘히 부각하며 그녀가 자신의 돈으로 식사를 사고 선물을 하는 것들을 하찮게 여긴다. 그런 허세 앞에서 리키는 자존심을 다친 것이다. 

물론 섹스가 애정의 필요충분조건인지 아닌지는 논할 생각이 없다. 내가 말하는 건 거절하는 방법을 말하는 거다. 함께 사는 배우자에게 애정을 욕망하는 것이 금지당했을 때 오는 결핍을 꼭 밖에 나가 젊은 남자에게서 해소할 수밖에 없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에게 어느날 젊은 대학생 남자 아이가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자신의 몸을 그토록 아껴주고 조심조심 대하고 욕망하는 남자를 알게 되어 채워지게 된 충족감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고타와의 만남은 자신이 물질적인 것들을 베풂으로써만이 지속될 수 있다고 규정해놓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타는 리키에게 자신의 순수성이 의심받는 것도 싫었을 테고, 실제로 남자로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받는 일이 자존심 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토록 리키의 돈을 거절하지만,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리키가 주는 폭신폭신하고 아늑한 삶에 쉽게 적응하고 해외 여행 경비를 요구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상태가 된다. 그러는 동안 리키는 돈의 맛에 길들여지고,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굳이 착각해본다. 자신이 그들과 같은 20대의 입구에 있는, 미래에 대책 없는 희망을 품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면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쉽게 사람을 좋아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몸을 허락하고 쉽게 미래를 약속하는, 이름 없는 누군가라고 착각해본다.  오랜 세월 남편의 손길을 받은 적 없는 불쌍한 아내가 아니라, 앞으로 실컷 성을 구가할 분방한 젊은이라고 착각해본다. 고타의 어깨를 안은 왼손 약지에 반지라곤 껴본 적이 없다고 착각해본다. (237/558)


리카는 혼잡한 출근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주위에 자각 없이 뿌려진 채 방치된 악의'에 놀라며, 폭신폭신한 돈의 순수성이라는 역설을 생각한다. 폭신폭신한 돈방석에 앉은 사람들은 노인을 밀치고 가는 여자와, 그 인간 뒈졌으면 좋겠어 하며 깔깔대는 십대들과 혀를 차며 어깨를 부딪치고 밀어내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들이다. 돈은 사람을 선하게 만들고, 아늑하게 만들고, 반대로 돈의 부재는 사람을 악하고 드세게 만든다. 리키의 눈에, 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하루하루를 채우는 사람들에게 해맑은 웃음은 사라진 것이다.


확실시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통장을 리카에게 맡긴 나고 다마에, 야마노우치 부부 등. 해맑게 웃고, 목소리가 거칠어지지 않고,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쉽게 사람을 믿고, 악의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상처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395/558)





[YES24] 종이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