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 태생부터 비주류와 소외를 가슴에 새긴 주홍글씨처럼 지니고 태어난다. 조선시대까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지만 부모가 저버린 도덕적 책임을 (만일 있다면) 떠안은 사람은 아무 영문도 모른채 태어난 서자다. 그리하여 우리의 홍길동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도 못하는 서자의 한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다. 어미가 버리고 할미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삼촌은 그 홍길동에게는 비록 부르지는 못할 아비였으나 허공에 대고 넋두리라도 할 대상으로 단단히 물질 세계에 존재했던 그 부르지못할 아비조차 삼촌에게는 없다. 버려진 아이가 아비라 부르지 못할 아비를 찾아왔을땐 부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을, 누구도 괜심가져주지 않을 생명이었으니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말을 더듬은 건 자신을 밖으로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걸 말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비도 없는 아비의 집 식구들에게 얹혀사는 처지의 갈 곳 없는 아이가 스스로의 고립되고 소외된 슬픈 위치를 누군가와 소통할 때마다 끝없이 상기시키는 하나의 장치였을 것이다. 그그그그그 그래서 나나나나나 나는 이이이이이 곳에서는 이렇게 말을 더듬어야만 스스로를 그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화자로 등장하는 그 삼촌의 조카인 나는 폭력의 현대사가 삼촌과 종태에게 무자비한 채칙질을 목격하는 목격자이자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단순 이분법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눌때 가해자 편이다. 그의 마음은 천방지축 망아지같은 사춘기 소년의 순박함을 닮았지만 해맑은 무지는 무지 그 자체로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그렇게 친한 친구 종태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중학생이 되도록 한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더 나쁜 건 종태가 (아마도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어선생 올리비아가 종태에게 베푸는 친절도, 이북 삼촌이 전수하는 이소령 무술을 종태가 더 인정받는 것도 그에게는 단지 어린 치기와 질투라고만 할 수 는 없는 우월감의 훼손이고 가진자의 탐욕이다. 그의 질투는 도를 넘어 결국 종태와 종태 가족에게 엄청난 비극의 도화선이 되지만 그것을 책임지지도 않는 것은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알레고리로 읽힌다.
화자는 종태를 볼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실수를 고백할 마음도 없고 자신의 그릇된 행동이 불러온 엄청난 비극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질 마음도 없다 다만 계속해서 마음의 짐을 얹고 살면서 괴로운 지식인 코스프레를 할 뿐이다. 종태를 면회가고위로하고 이야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일, 그것은 자신을 의한 구제일 뿐이지 종태나 종태 가족에게, 그리고 이미 일어나버린 과거의 상실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삼촌에게 이소령은 하나의 희망이며 미래이며 철학이고 가치관이 다.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삼촌이 말더듬이 증세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건 삼촌이 이소룡을 완전히 포기하고 부터다 그가 희망을 덮고 모진이 세상 모질게 살아가기로 작정했을 때 그는 비주류의 서자라는 굴레를 나온다. '굴러들어온 서자'라는 집안 내 위치와 말더듬이라는 장애는 이소령 무도 정신의 추구로 삼박자를 이루며 어우러져 삼촌이 처한 그 비루하고 절박한 상황을 순순히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또 헤쳐나가가게 하는 하나의 희망이자 동력었을 것이다. 믿었던 중국집 주방장 칼잡이에게 짱깨 배달로 모은 그 알량한 월급뭉치들을 후루룩 날리고, 동네 깡패들 눈엣 가시가 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 헤어지고 싶은 애인이 청산가리를 타서 준 엽차를 마시고 속이 너덜너덜해지고, 짝퉁 이소령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파도와 싸우고 공안에 잡히는 곤궁을 겪고 홍콩을 눈앞에 둔 채 포기해야 했던 세월을 두고, 삼청대 순화 교육이라는 오천년 역사상 전례가 없던 그 모질고 또 모진 폭력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삼촌은 이제 말을 더듬지 않는다.
이제 삼촌에게, 그리고 우리의 화자에게, 또 순박했지만 애비없이 가난한 아이가 자라 삶을 지속하기 위한 선택의 폭이 단 하나밖에 없었던 종태에게 1권만큼 분량의 또다룬 삶이 2권에서 기다리고 있다 .
원문 작성 : 예스24 도서
반면 화자로 등장하는 그 삼촌의 조카인 나는 폭력의 현대사가 삼촌과 종태에게 무자비한 채칙질을 목격하는 목격자이자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단순 이분법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눌때 가해자 편이다. 그의 마음은 천방지축 망아지같은 사춘기 소년의 순박함을 닮았지만 해맑은 무지는 무지 그 자체로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그렇게 친한 친구 종태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중학생이 되도록 한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더 나쁜 건 종태가 (아마도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어선생 올리비아가 종태에게 베푸는 친절도, 이북 삼촌이 전수하는 이소령 무술을 종태가 더 인정받는 것도 그에게는 단지 어린 치기와 질투라고만 할 수 는 없는 우월감의 훼손이고 가진자의 탐욕이다. 그의 질투는 도를 넘어 결국 종태와 종태 가족에게 엄청난 비극의 도화선이 되지만 그것을 책임지지도 않는 것은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알레고리로 읽힌다.
화자는 종태를 볼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실수를 고백할 마음도 없고 자신의 그릇된 행동이 불러온 엄청난 비극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질 마음도 없다 다만 계속해서 마음의 짐을 얹고 살면서 괴로운 지식인 코스프레를 할 뿐이다. 종태를 면회가고위로하고 이야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일, 그것은 자신을 의한 구제일 뿐이지 종태나 종태 가족에게, 그리고 이미 일어나버린 과거의 상실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삼촌에게 이소령은 하나의 희망이며 미래이며 철학이고 가치관이 다.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삼촌이 말더듬이 증세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건 삼촌이 이소룡을 완전히 포기하고 부터다 그가 희망을 덮고 모진이 세상 모질게 살아가기로 작정했을 때 그는 비주류의 서자라는 굴레를 나온다. '굴러들어온 서자'라는 집안 내 위치와 말더듬이라는 장애는 이소령 무도 정신의 추구로 삼박자를 이루며 어우러져 삼촌이 처한 그 비루하고 절박한 상황을 순순히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또 헤쳐나가가게 하는 하나의 희망이자 동력었을 것이다. 믿었던 중국집 주방장 칼잡이에게 짱깨 배달로 모은 그 알량한 월급뭉치들을 후루룩 날리고, 동네 깡패들 눈엣 가시가 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 헤어지고 싶은 애인이 청산가리를 타서 준 엽차를 마시고 속이 너덜너덜해지고, 짝퉁 이소령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파도와 싸우고 공안에 잡히는 곤궁을 겪고 홍콩을 눈앞에 둔 채 포기해야 했던 세월을 두고, 삼청대 순화 교육이라는 오천년 역사상 전례가 없던 그 모질고 또 모진 폭력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삼촌은 이제 말을 더듬지 않는다.
이제 삼촌에게, 그리고 우리의 화자에게, 또 순박했지만 애비없이 가난한 아이가 자라 삶을 지속하기 위한 선택의 폭이 단 하나밖에 없었던 종태에게 1권만큼 분량의 또다룬 삶이 2권에서 기다리고 있다 .
원문 작성 : 예스24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