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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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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오코너]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소설의 첫장을 넘겼을 때 생각난 것은, 2년쯤 전에 SBS에 방송한 한 다큐프로그램이었다. 2009년 사상 유례없는 대침체를 겪은 미국인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살 곳이 없어 차 속에서 돌아다니면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방영했다. 바바로 오코너의 에서 조지나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도 같다.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의 가출로 월세를 못내 쫓겨나고 갈 곳이 없어진 조지나의 가족은 작은 차에 필수품들을 싣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패스트푸드점의 화장실에서 씻고, 차에서 먹고, 차에서 잔다. 한 군데에 계속 주차를 해두면 쫓겨날까봐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목욕도 못하고 옷도 제대로 빨아입지 못하고 머리는 떡이 되어 냄새를 풍기며 학교에 가야 하는 여자 아이, 학교에서 내준 과제 제출물에는 햄버거 소스가 묻어있고,..
[박생강]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누구도 빼빼로 데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들 핑계 대기 위해 만든 날에 불과 하니까요 남자친구는 여자친구를 안아보고 싶다는 말 대신에 빼빼로를 선물하죠.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에게 잘 좀 하지 라는 말 대신에 빼빼로를 선물해요. 제과 업체는 쉽게 돈 벌고 싶다는 말 대신에 빼빼로데이를 홍보 하죠. 화장품 가게 나 의류업체는 숟가락 좀 얹어 보겠다는 말 대신에 빼빼로데이 특별 이벤트를 준비 하죠.나 같은 솔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들키지 않으려 빼빼로데이를 빈정대죠. 언론인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만만한 안줏감을 찾아 빼빼로데이를 비난 해요. 핑계와 핑계가 풍선처럼 부풀면서 거대한 빼빼로데이를 만들었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봐요.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남자친구에게 빼빼로를 선물하..
[헬렌 오이예미] 미스터 폭스, 꼬리치고 도망친 남자 미스터 폭스, 꼬리치고 도망친 남자 - 헬렌 오이예미 지음, 최세희 옮김/다산책방옛날 옛날 러느 산골에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하고 살고 있었어. 그런데 너무 적적했던거야 그래서 산신령한테 아기들 갖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대 그랬더니 어느날 강가에 할머니가 빨래를 하러 갔는데 사과가 둥둥 떠내려오더래. 그래서 할아버지랑 나누어 먹으려고 집에 가져가서 반으로 뚝 잘랐더니. 글쎄 거기서 갓난 아기가 응애 응애 하고 나오더래. 할아버지하고 할머니는 너무 기뻤대.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에서 듣던 얘기다.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외울만큼 하고 또하고 또하고 했던 얘기는 지금 생각해보니 반전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을 뿐더러 인물의 성격도 드러나지 않고 내면 묘사도 없다. 개연성도 없고 말도 안된다. 게다가 사..
[천명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그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전무후무할 전혀 새로운 소설 를 쓴 천명관의 소설집이다. 2010부터 2014 6월에 걸쳐 문학동네를 비롯하여 8개의 다른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을 수록한 소설집이다. 사실 소설 작가가 단편 모음집을 낼 때에는 어떤 통일된 하나의 주제로 모으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긴 시간동안 엄청 많은 소설을 써낸 후 이를 주제별로 분류해서 하나씩 책을 내려면 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단편소설을 써야 할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대개 작가의 성향이 일정 기간 내에서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는 글을 쓰기 때문일테지만, 이 책은 책의 제목과, 여러 개의 소설들과 또 문체들이 잘 조화되어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는 것 같다. 는 3년전 실직한 사내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해가는 과정을, 은 ..
[마리 다리외세크] 가시내 - 아이들은 섹스 놀이가 끝나면 어른이 될까 가시내, 여자아이를 말하는 것 같다. 사춘기 여자 아이들. 그 아이들의 성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배경 묘사가 없다. 인물에 대한 설명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목적을 상실한채 우주 바깥쪽에서 유영할 뿐이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난해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머리속으로 배경이 명료하게 그려지는 시점이 생기는데, 이 소설은 끝내 그 지점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제 초경을 막 시작한 솔랑주와 친구들은 오로지 성(sex)만 보인다. 그들의 대화는 성에서 시작해서 성으로 끝난다. 그들이 하는 행동 역시 성적 호기심으로 시작된 일관되고 탈선적인 행위가 다다. 온갖 성적인 행위와 성기를 뜻하는 금기어들이 지면 가득 채워져 있지만, 완전히 발가벗은 사람들로 우굴대는 목욕탕에서..
[이승우] 신중한 사람 이승우 작가가 등장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방법은 때로 독자를 기만하는 듯 말장난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게 동어 반복적이다. 그러나 그 반복적인 문장을 계속 읽다보면 그것이 기만이 아니며 기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쓴 것은 아니지만 기만인 것처럼 보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기만인가 기만이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읽도록 유도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떤 때는 기만인지 아닌지가 오리무중 그 문장과 그 문장을 다른 문장으로 반복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기만하는 듯한 문체를 유지함으로써 독자들이 그것을 기만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다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좋다. 좋다. 기만이든 아니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기만이냐 아니냐보다는 보다 은밀한 내면, 감추어진 욕망, 비뚤어진 마음을 오히려 ..
[박혜영] 비밀 정원 혼불문학상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 작품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쓰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만나기도 어렵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해진 형식의 틀을 벗어나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일은 모험이고 때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또, 진부하지 않다고 해서 모두 최고의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훌륭한 예술은 발상의 전환, 새로운 시도, 침신한 구성과 소재가 필수다. 이 소설 어딘지 진부한듯 하면서 파격적이다. 비밀 정원 - 박혜영 지음/다산책방 20세기초 봇물터진 서양문물에 도취한 명문가 지식인들의 나르시스적인 엘리트 의식에 흠뻑 절은 듯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고가의 풍경을 한없이 느리고 정적..
[아멜리 노통브] 푸른 수염 푸른 수염 -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열린책들모든 빛이 차단되어 캄캄한 암실은 비밀이 봉인된 곳이다. 그 곳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애초부터 규칙이 그랬다. 금단의 열매는 탐스럽게 익어 향기를 뿌리지만 먹을 수 없다는 것, 먹으면 자멸을 초래한다는 것. 모든 금단의 구역, 금단의 열매에 대한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가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하지 말하야 할 것을 말함으로써 비극적 신화가 완성된다. 그녀들이 암실에 들어서는 순간은 마지막 절제된 욕망의 끝에서 금단의 열매를 향해 손을 뻗치는 행위였다. 누구나 그것을 알지만, 그곳은 어서 들어오라고, 어서 먹어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러나,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구역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