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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밖 여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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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트렁크 평생 일부일처제의 관습이 인간에게서 보편적인 특성이 된 계기가 그 무엇이었더라도, 그것은 서서히 부식되고 부서져가고 있으며,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허물어질 가능성을 지닌다. 이미 높은 이혼율과, 주거 등 필요에 의해 때 서로 함께 살다가 불필요하면 쉽게 헤어지는 동거족, 그리고 아예 혼자 사는 싱글족들의 급부상은 앞으로의 사회가 전통적 결혼을 기반으로 가족단위의 모습과는 달라질 것을 예고한다. 평소 다양한 형태의 계약결혼을 대안으로 여러 상상력을 펼치던 중, 김려령이 창조해낸 NM결혼은 새로운 시도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결혼이 아닌 서비스 개념이다. 아마도 결혼정보회사에서 법적 정서적 구속력을 가진 결혼이 아닌 소꿉놀이에 불과한 결혼 코스프레의 상대를 찾는 돈 많은 회원들이 있다는 낌새를 포..
[프레드릭 배크만] 오베라는 남자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다산책방성깔있고 색깔있는 꽃할배들의 이야기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세인가보다. 북유럽 문화 역시 바람결에 실려 와서 잠시 스치고 지나갈 유행은 아닌가보다, 이 그랬듯, 역시 북유럽에서 왔다. Saab와 Volvo 자동차를 만들고, 전세계에 IKEA 가구를 공급하는 나라, 세계 최고의 복지로 교육, 건강, 연금, 노인복지, 사회복지가 모두 무상인 나라. 여행서를 보면, 도시는 너무 빈틈없이 깨끗하고, 음식은 맛이 없고, 물가는 너무 비싸다는 나라. 스웨덴의 사회적인 모습을 소설 속에서 접하니, 너무 과한 복지도 개인의 권리와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할배들은 어디서나 대체로 툴툴거린다. 늙어 허약해지기 전에도 그들..
[김성재]토끼전(완판본) 어릴 때부터 듣거나 읽거나 보거나 했던 고전 이야기들은 어디서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 조금 조금씩 다른 플롯을 가진다. 기억하고 있던 내용이랑 다른 부분을 만날 때, 원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하곤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 '원래' 라는 말이 틀리다. 설화가 전승되어 가는 과정 혹은 작자미상의 어떤 창작자에 의해 특정 시점에 쓰여졌다 하더라도, 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에 따라 구전이나 필사의 과정에서 가감되어 자연스럽게 변형되는 것이 우리의 고전 이야기들이 가진 특징이다. 이야기는 판소리를 통해 소리와 음악으로 융합되어 대를 이어 전승되었다. 그러니까 토끼전, 심청전, 흥부전 같은 판소리 계열의 소설은 구전을 통해 전달되다가, 판소리 사설로 채택되고, 이 과정에서 판소리 대본을 기록하는 창본..
[한승재]엄청 멍충한 길거리 캐스팅 신화의 주인공은 건축가다. 하라는 건축은 하고, 또 공상도 같이 하면서 소설을 썼나부다. 써놓고 보니 치열한 등단 무대에 던져놓고 기다리긴 싫고, 써놓은 건 아깝고,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겠지? 홍대앞에서 자가 출판한 책을 펼쳐놓고 팔았다. 될 사람은 뭘 해도 된다. 무명의 소설가가 자가 출판한 책을 길거리에서 팔고 있을 때, 무명의 소설가의 책을 눈여겨볼만한 안목을 가진 출판기획자가 지나갈 확률은 얼마나될까. 복권 당첨만큼 힘들지 않을까. 마치 짜고친 고스톱처럼 마법같은 인연이 만들어낸 책은 '등단하지 못한' 소설가의 책 답지 않았다. 물론 이런 대형 출판사의 눈에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정도의 소설이라면 기존 등단 시장에서 배출된 작가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을 ..
잔혹한 실화가 고전으로 태어나기까지 [장화홍련전] 장화홍련전은 실화에 긴 시간에 걸친 사람들의 소문과 상상이 합쳐져서 오랫동안 사람들을 매료시켜왔고 아직까지 끊임없이 재해석, 재탄생되어 온 우리나라 고전이다. 실화는 효종 1651년 평안도 철산에서 일어난 두 재미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정동흘이라는 철산 부사의 6대손과 8대손이 각각 선조 할아버지의 활약을 기록한 것에 다시 또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19세기 후반 장화홍련전으로 완전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꾸준하게 사실과 허구가 뒤섞이여 이야기가 된 장화 홍련전은 아직도 판소리, 창극, 영화, 드라마로 수없이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어 우리의 문화 속에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장화홍련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의 컨텐츠는 미국 영화 안나와 알렉스라는 영화로도 재탄생되..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소설이 시작했을 땐 이미 그 속에서 튜링은 죽었다. 그러니 소설 속에 튜링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튜링의 죽음을 쫓는 형사이다. 수수께끼같이 알쏭달쏭한 논문들과 자취들을 남기고 간 그의 마지막은 그의 삶만큼이나 미스터리한 흔적들을 남겼다. 한 입 베어문 사과, 그 사과를 담궜던 청산가리 냄비, 그를 감시하던 시그마(대머리에 시그마 모양의 점이 있는 남자), 보내지 않은 편지, 꿈을 기록한 세 권의 노트. 사건을 맡은 코렐 경관은 튜링의 삶과 철학을 추적해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과거와 이루지 못한 꿈과 방황의 나날들을 쫓는다. 코렐이 쫓는 것은 튜링의 삶인 동시에 그의 가지 못한 길이기도 하다. 튜링처럼,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던 자신, 튜링처럼 캠버리지 대학에 입학할 수도 있었을 삶. 튜링의 관..
[빌헬름 그림, 야콥 그림] 그림형제 동화전집 그림형제 동화전집 (완역본) - 그림 형제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옮김/현대지성전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을 통털어 그림 동화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접하지 않고 성장한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인류 역사상 성경이 가장 베스트셀러라지만 18세기 이후 동화의 이야기의 세계에서라면 단연 그림동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디즈니에서 변주해서 들려주거나 영화로 만들어서 퍼진 이야기에서부터 각종 언어의 각종 매체와 동화책들까지 모두 합치면 그림형제가 책을 펴낸 이래로 어쩌면 가장 많은 독자에게 여러가지 버전으로 읽히고, 또 다른 스토리와 문학에도 영감을 준 이야기들이 그림형제가 수집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 책은 그림형제의 동화 전집으로 그들이 수집한 모든 이야기가 수록된 이야기집이다. 그림 형제 빌헬름과 야콥은 입에..
[버드폴더]고양이인척 호랑이 고양이인 척 호랑이 - 버드폴더 글.그림/놀(다산북스)고양이와 호랑이는 외모적으로 비슷하다. 같은 과다. 진짜 같은 과. 찾아 보니 고양이는 고양이과의 고양이아과이고, 호랑이는 고양이과의 표범아과 속이다. 육식성이 강하고 호랑이와 재규어를 제외하고는 물을 싫어한다는 특징이 있다. 저자 버드폴더는 필명이다. 영어로 된 이름이라 외국 저자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트위터로 연재했던 그림 동화를 묶어 책으로 냈다. 동화책이라고 하기엔 두께가 두툼하고 양장이지만, 주로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호랑이와 똑같이 생긴 고양이가 있다고 하는데, 야생 피싱고양이으로 저렇게 생겼다고 한다. 호랑이는 자신이 고양이인줄 알고, 고양이는 자신이 호랑이인줄 안다. 호랑이가 고양이로 알게 되는 건, 숲속에 버려진 아기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