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류신은 책의 서장에서 '벤야민을 향한 오롯한 사랑을 체현하는' 산책자 구보씨를 소환하겠음을 밝히며 책 속의 구보는 '식민 경성의 거리를 주유한 최초의 플라뇌르'이며 1930년대 박태원에 의해 처음 창조된 버전에 가까운 캐랙터로 '문학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낙차를 경험하는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입체적 인물'이라 소개한다. 이해는 되지만 비일상적 어휘의 남발로 조금 거칠게 느껴지는 이 말을,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식대로 해석해보면 그러니까, '벤야민이 남긴 [아케이드 프로젝트] 골격에 서울이라는 장소를 대입하여 벤야민의 철학대로 사유하고 밴야민의 시선으로 서울을 탐색해 보겠다'는 쯤 된다. 저자인 류신 자신은 빠지고 벤야민의 페르소나를 가진 구보라는 산책자를 등장시켜 벤야민의 사유를 모방해 보겠다는 것이다.
구보는 화자의 역할을 맡는디. 소설처럼 쓰여진 도시문화예술비평 쯤으로 여기고 읽으면 되겠다. 소설의 형식을 모방하여 구보라는 살아있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비평적 내용에 감성과 주관과 생동감과 자유를 시도하는 것은 색다른 발상이다. 저자는 이를 로맨티시즘이라고 명명했다. 이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독자에게 주지시키는 방식은 조금 뜬금없다. 구보가 홍대 앞 탐앤탐스에서 만난 친구 K씨와의 대화에서 본인은 지금 새로운 글쓰기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설인 동시에 평론인 장르라고 하면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개요를 소개하고, 스스로의 책에 색다른 발상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식이다. 그러니까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류신이 출간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문학평론인 이 책이기도 하면서, 책의 내부에 등장시킨 구보가 진행중인 평론인 동시에 소설인 프로젝트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글쓰기는 분명 낯설고 색다르다.
나는 자주 화자의 시점에서 길을 잃는다. '벤야민이 말했던 아케이드의 특성을 상기했다.', '벤야민이 말했던 아우라가 감지됐다.' '벤야민은 썼다', 그리고 구보의 사유는 그 벤야민을 상기한, 벤야민이 말했던, 벤야민이 썼던 방식 그대로 서울로 장소를 옮겨와 재현된다. '오롯한 사랑'이 일종의 사유의 모방이라 할 수 있겠다. 벤야민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았기 때문이었는지 가끔 구보가 추구하는 언어는 뜬금없으리만큼 현학적이고 거칠게 느껴진다. 결국 구보가 산책하면서 등장시킨 수많은 도시 이미지의 텍스트들은 류신과 구보가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프로젝트 자료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아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p.101)
판타스마고리아, 요술 환등, 리비도 같은 단어가 내게 전달하는 독자와 필자와의 간극에 잠시 반문해본다. 무엇 때문에 저들의 세상 속으로 편입하려 안달하는 거지. 얼마 전에 읽은 진중권의 미학에세이에서 밝힌 김규항의 주장 중 일부인 "어느 나라에서건 평론은 주로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들끼리 읽는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평론가,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의 범위는 애매하지만)의 넓은 원. 그 원 안의 주체들은 넓은 층을 끌어들고자 고군분투하기도 하지만, 거기엔 분명 그들만 유?하는 jargon들이 주석없이 소비되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저자의 방대한 자료 수집과 지적인 탐구로, 서울이라는 장소를 시대가 지닌 문화 예술적 생산의 파편들과 아울러 탐색하고 비판하는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구보씨는 서울을 산책하며 포착된 이미지들을 문학의 텍스트들과 대면시킨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도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구보씨의 발길 닿는 곳, 구보씨의 시선이 머물고 사유가 시작되는 곳에 그림자처럼 동반한다. 문학 작품 내의 텍스트를 떠올려서 사유를 길어 올린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심지어 구보씨는 류신이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자료 조사를 거쳐 탈고하는 단계의 축소판인 문학적 몽타지를 조동범의 시집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에 대한 평론의 한 형태인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초안]으로 재현한다. 중첩된 구조 안쪽의 구보가 서술하고 매듭짓는 벤야민과 조동범의 문학세계에서의 연관성과 차별성은 류신이 구보를 등장시켜 해체하고 있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중첩된 구조는 또 다른 바깥 중첩인 구보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임과 연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구보가 자신의 화신인 구보2를 만들어 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끝내고 사회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은 류신이 구보를 만들어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끝내는 과정과 등치 관계가 아닐까. 어쨌든 류신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되 마음껏 현실을 굴레에서 이탈하는 해방의 글쓰기'를 하고 싶은 속내를 구보를 통해 드러낸다. 구보는 유학 후 룸펜 생활을 하며 창작 활동을 하지만 류신은 구보가 외면하고자 했던 그 철저히 자본주의 속에 깊숙히 편입된, 교수라는 사회적 입지를 구축한 사람이다.어쨌든 조동범의 평론의 한 형태인 초안에서 공간의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의 구체성은 구보의 산책을 담은 서울 아케이트 프로젝트에서 생동감있게 재현된다.
구보는 ...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상이 아니라 이미지의 파편을 통해 진짜 서울의 풍경을 독해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p99)
작가 류신은 구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 서울 아케이트 프로젝트를 스스로 평론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해가는 과정 중의 사유 중 하나로 슬쩍 끼워넣은 똘똘하고 계산된 곳곳의 장치들이다. 나처럼 가끔씩 길을 잃고 헤매는 독자들에게는 유용하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책의 해석을 중간 중간에 권유당하는 느낌도 든다.
구보가 산책했던 서울은 벤야민이 비판했던 '상품 자본주의의 원조 신전이었던 아케이드의 생명력과 끈질긴 적응력'을 보여주는 '신자유주의의 물신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 욕망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은 '치욕의 역사가 진열된 고궁의 아케이드'였고, 서울광장은 '서울이라는 욕망의 분화구'였으며, 서울시청은 '21세기 통섭과 혼종의 시대를 서울의 '중심의 중심'에서 건축으로 현시'하였다. '자본주의를 신흥 종교'로 떠받들어지는 세상에서, 백화점은 구보에게 상품 물신이 존재의 공허를 일시적으로 위무해주는 자본주의의 예배당'이며, 그곳을 쇼핑하는 사람들은 '생의 불안과 두려움을 상품 구매와 소유로 보상받으려는 신도'들로 읽힌다. 오래 전 구보에게, '금지된 욕망이 밀거래되는 곳'이었던 세운상가는, '한국 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신화가 좌절된 유토피아의 폐허'이다. 홍대 입구에서는 '상업자본의 진군'을, 지하철 노선도에서는 '자기 일상의 동선이 만들어 내는 고유한 별자리'를 상상했고, 지하도는 '뒤죽박죽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시종일관 한 곳으로 모아 담는 도시의 깔대기'를 떠올렸다.
자동판매기에서 캔음료를 꺼내 마시며, 지불능력이라는 전제조건이 만족된다면, '서울에서 욕망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즉각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하철은 '대도시에 새로이 출현한 무표정한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승객들의 표정에서 '어떠한 상황에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는 무관심의 의지'를 본다. 현대 소비 사회의 상징물들을 예의 관찰하면서 무기력하고 볼모화된 현대인의 삶을 포착하던 그는 버거킹에서 점심을 해결하며, '현대인은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사물이 지닌 기호나 이미지를 소비한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코엑스 수족관에 들러 수마트라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비루한 자화상'을 본다.
반디앤루니스에서 발견한 청소년 권장도서 변신을 보며 떠올린 카프카. 출근하면 성실했고 퇴근후엔 필사적이었던, 생활을 위해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일상의 답답함을 무시하지 않았던 카프카의 정수리에 정확히 8:2로 나뉘어진 가리마를,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밥벌이에 비해 네 배는 무겁다는 등식을 대입해 본다. 그렇다 결국 밥벌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이든 욕망이든 소비이든 밥벌이의 무거운 어깨는 제도를 떠나, 사회를 떠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근원적인 최소 자유를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
한국종합무역센터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이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의 거점이며, 이 제국의 건물과 건물들은 다양한 아케이드로 네트워크를 이루고, 그래서 경계가 없다. 요컨대 아케이드는 신자유주의라는 제국의 혈관이라 결론내린다.
구보는 떠올린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나는 즉각적으로, 유토피아는 커녕, 근간 연일 이슈가 되어온 일련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하나의 구호 안에 뭉쳐지고 있는 현상들을 떠올렸다. 구보씨는 안녕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유학을 다녀왔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구보씨는 현 체제 내에서 안녕할까? 물론 안녕하지 않다. 아직은. 그렇지만 체제 속에 안녕하려는 의지는 구보의 마지막 탈고를 마치는 과정과 룸펜을 벗어나기로 작정한 일련의 일상들을 짧게 기술한 에필로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본의 물신이 대중에게 주입하는 현혹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해체할 수 있는 사유 이미지들을 포착하려고 애썼다는 창작의도를 다시 한 번 밝히며 끝을 맺는다.
청계천에서 구보는 자신의 우울이 자유의 다른 얼굴이 되길 소망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그렇다.